고대사

죽거나 살거나: 1945년 3~4월 인도차이나 프랑스군의 철수와 생존 투쟁

1945년 3월 8일, 프랑스군 주력 부대는 여전히 타이응우옌(Thái Nguyên)과 까오방(Cao Bằng) 사이에 분산되어 있었으며, 세귀앙(Seguin) 대령은 까오방에 머물고 있었다. 예정된 집결지인 뚜옌꽝(Tuyên Quang)까지는 최상의 조건에서도 나흘에서 닷새가 소요될 상황이었다. 다만 제9식민지보병연대 2대대(밀르 대대, 2/9e R.I.C.)만이 75mm 포병대를 동반하여 타이응우옌과 뚜옌꽝 사이를 이동 중이었는데, 이 부대가 가장 먼저 중심지에 도착했다. 당시 뚜옌꽝에는 이미 수송중대 2개, 75mm 포병대 1개, 제19혼성보병연대(19e R.M.I.) 2개 분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지휘권 이양과 뚜옌꽝 방어선 구축

알레산드리(Alessandri) 장군은 사바티에(Sabattier) 장군의 소식이 두절된 상황에서, 세귀앙 대령이 너무 늦게 도착하여 뚜옌꽝에 집결 중인 부대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을 것을 우려했다. 이에 사바티에 장군 참모부 부참모장인 카포니(Capponi) 소령을 '클레르 강 그룹(Groupe de la Rivière Claire)'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3월 12일 뚜옌꽝에 도착한 신임 그룹장은 밀르(Commandant Mille) 지휘관이 이미 마련한 배치, 즉 밀르 대대의 2개 중대가 뚜옌꽝 남쪽 접근로를 차단하고 있는 전술을 승인했다.

전선 붕괴와 철수 개시

3월 13일, 응안썬(Ngan Son)을 경유하던 세귀앙 대령은 인도차이나 경비대(G.I.) 퐁티슈(Pontich) 감찰관에게 식민지 도로(R.C.) 2호선과 3호선 사이, 박깐(Bắc Kạn)에 주둔한 르파주(Lepage) 대대(제16혼성식민지연대 4대대, 4/16e R.M.I.C.)에서 게릴라 임무를 수행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그에게 뚜옌꽝으로 이동하여 카포니 지휘관 휘하에 들어가라고 명령했다.

한편 뚜옌꽝 서쪽 방어선이 붕괴(푸옌빈 나루 함락)되자, 12일 밤부터 13일 새벽 사이에 시가지가 철수되었고 부대는 박목(Bắc Mực) 방향으로 이동했다. 르파주 대대에는 치엠호아(Chiêm Hóa)로 합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세귀앙 대령의 바오락(Bảo Lạc) 거점 구상

3월 14일 박깐에 도착한 세귀앙 대령은 동당(Đồng Đăng), 나참(Na Cham), 탓케(Thất Khê)의 함락 소식을 접했다. 후자의 두 초소 기동대는 이미 박깐으로 합류한 상태였다. 또한 하장(Hà Giang), 라오까이(Lào Cai), 뚜옌꽝까지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 중심지의 상실로 초기 임무 중 하나가 무의미해지자, 세귀앙 대령은 바오락으로 철수하여 게릴라 기지를 구축하기로 결정했다.

보급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세 개의 경로가 채택되었다. 선발대가 3월 24일 바오락에 도착했을 때 초소는 이미 버려진 상태였으며, 이들은 주력 부대가 3월 27일 도착할 때까지 방어 태세를 갖췄다.

일본군의 공세와 국경 탈출

일본군은 속장(Soc Giang)과 응우옌빈(Nguyễn Bình)에서 진격해 4월 3일 바오락을 공격했고, 이튿날 4일에는 남꿰(Nam Quet)에서 재차 공세를 펼쳤다. 인도차이나인 병사들의 대량 탈영으로 전력이 약화된 부대는 결국 중국 영토인 띠엔피아오(Tiên Pião) 방향으로 국경을 넘어 탈출했다.

카포니 그룹의 비극적 최후

박목을 떠난 카포니 그룹은 빈투이(Vĩnh Thụy)로 향했으나, 이곳은 이미 파괴되고 버려진 상태였다. 박꽝(Bắc Quang) 역시 일본군 수중이었기에, 그룹은 옌빈사(Yên Bình Xạ)로 향했다. 이곳 또한 파괴되고 포기된 상태였다. 그룹은 응이아도(Nghĩa Đổ) 고개를 넘어 파카(Pa Kha)로 가려 했으나, 폭우 속에서 벼랑 같은 산길을 통과하느라 짐승과 장비에 치명적인 손실을 입었다.

파카마저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자, 그룹은 콘룽(Khon Lung)과 남옌(Nam Yen) 쪽으로 우회했으나 분지 지형에서 포위되어 3월 27일 항복을 강요당했다. 일부 개인과 소그룹은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프랑스군 부대와 합류하는 데 성공했으나, 나머지는 도주 과정에서 일본이 내건 현상금을 노린 먀오족(Meo, 몽족) 산악민들에게 살해되거나 괴멸당했다.

르파주 대대와 퐁티슈 분대의 행로

3월 22일 카포니 지휘관으로부터 기동의 자유를 되찾은 르파주 대대는 박메(Bắc Mê), 콕판(Cốc Pán), 루난(Loun Lan)을 경유하여 중국으로 탈출했다. 박메에 주둔한 인도차이나 경비대 초소가 그대로 남아 있어 보급을 받을 수 있었다.

퐁티슈 감찰관의 분대는 4월 6일까지 대일 게릴라전을 지속했다. 퐁티슈는 3월 23일 보응우옌지압(Võ Nguyên Giáp, 훗날 베트민 총사령관)과 합의에 이르렀으나, 4월 1일 베트민의 매복 공격으로 부상을 입고 프랑스인 부하들과 함께 포로로 잡혔다. 이들은 1년 뒤인 1946년 3월 29일에야 하노이의 프랑스 대표단에 인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