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리아의 역사는 크게 세 시기로 나뉩니다. 그중 세 번째 시기인 '신아시리아(Neo-Assyria)'는 가장 찬란했던 동시에 가장 피로 물들고 파괴적인 시기였습니다. 이 시대는 기원전 745년에 시작되어 기원전 609년, 아시리아 국가가 완전히 해체되면서 막을 내립니다.
내란의 늪, 그리고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의 등장
기원전 824년 샬만에세르 3세가 사망하자 왕국은 반란과 내전으로 크게 흔들렸습니다. 전설적인 여왕 셈라미스(샴무라마트)와 그녀의 아들 아다드니라리 3세조차 이러한 몰락의 흐름을 잡지 못했습니다.
기원전 745년, 장군 출신의 풀루(Pulu)가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차지했고,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는 위대한 개혁가임을 증명하며 국가와 군대를 대대적으로 재편했습니다. 특히 군대는 왕국을 지탱하는 최대의 기둥이자, 새로운 정복을 통해 제국에 새로운 부를 가져오는 핵심 도구였습니다.
네 개 부대로 구성된 아시리아군
개혁된 아시리아군은 네 개의 주력 부대로 나뉘었습니다.
1. 쿠루부티(Kurubuti)
왕실 직속 근위 부대입니다. 쿠루부티는 왕, 여왕, 왕세자 각각의 호위를 담당했으며, 중장 전차와 기병, 정예 보병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사르곤 2세 시대에는 왕의 개인 호위대만 1,000명에 달했습니다.
2. 키시르 사루티(Kishir Saruti)
왕의 상비 정규군으로, 전차·기병·보병 부대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이 부대에는 많은 외국인들이 포함되었는데, 그들에게는 아시리아식 군복과 무기가 지급되어 원주민과 구별되지 않고 쉽게 통합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인 병사의 존재도 기록으로 전해집니다. 보병은 근위대처럼 대형 방패·창·검으로 무장한 중장 보병과, 경무장한 궁수 및 투석병으로 구분되었습니다.
3. 사브 사리(Sab Sari)
'왕의 사람들'이라 불린 지역 부대입니다. 상비군이 아니며, 토지를 소유한 자유민이나 귀족 영지에서 일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었습니다. 필요할 때 각 주 단위로 편성되었고, 주된 역할은 해당 지방의 방위였습니다.
4. 디쿠트 마티(Dikut Mati)
중무기를 들 수 있는 모든 성인 남성의 총동원 체계입니다. 오직 절박한 상황에서만 편성되었으며, 징집된 백성들로 이루어져 있어 훈련이 부족하고 무장도 열악했습니다. 이들은 검, 창, 투창은 물론 심지어 농기구까지 들고 전장에 나섰습니다.
지휘 체계와 부대 편성
군의 최고 사령관은 왕(샤룸, Sharum)이었으며, 그다음 서열은 장군인 투르타누(Tourtanou)가 차지했습니다. 흥롭게도 투르타누는 두 명이 존재했는데, 하나는 우익을, 다른 하나는 좌익을 담당했습니다. 가장 작은 전술 단위는 10인 분대였고, 여러 분대가 모여 중대를 이루었으며, 중대들이 다시 모여 대대 또는 연대급 규모의 사크누(Saknu)를 형성했습니다.
하위 전차 부대는 다섯 대의 전차로 구성되었습니다. 기병은 두 유형으로 나뉘었지만 공동 부대로 운용되었는데, 절반은 활과 검으로, 나머지는 창과 검으로 무장했습니다. 아시리아인들은 라이벌이었던 엘람에서 병사 수송용 경전차를 도입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차와 기병의 운용
이 시기 전차는 대체로 말 네 마리가 끌었으며, 마부 한 명과 창과 활로 무장한 전사 세 명을 태웠습니다. 아시리아의 중장 전차는 중세 기사처럼 적진을 타격해 붕괴시키는 돌파 무기였고, 그 목표는 적 진영의 분열과 해체였습니다.
전차는 보통 전투 대형의 양 측면에 배치되어 기병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기병은 측면 돌파 임무 외에도 충격 공격, 지연 작전, 적 소모전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 외에도 경무장 궁기병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정찰과 전령 역할에 더 적합했습니다.
정교하게 분화된 보병
중장 보병은 발목부터 거의 입까지 몸을 덮는 대형 방패를 사용했습니다. 투구와 흉갑을 착용하고 창과 검으로 무장했으며, 조밀한 팔랑크스식 대형을 이루었지만 그리스인들처럼 밀어붙이는 압박 전술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경장 보병은 작은 방패, 창, 검, 투구를 갖추었으나 갑옷은 거의 없거나 전혀 없었습니다. 이들은 민첩성이 뛰어나 전차 부대를 지원하거나, 험준한 지형에서 산개 대형으로 전투를 벌였습니다.
또한 투구와 흉갑을 착용하고 검과 활로 무장한 중장 궁수 부대도 있었는데, 이들은 조밀한 대형을 이루며 화살로 다른 보병을 지원했습니다. 경보병, 투석병, 궁수들은 매우 느슨한 대형으로 전투했으며, 이들에게는 투구도 갑옷도 방패도 없었습니다.
공성전의 선구자
아시리아인들은 공성전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았고, 공성 전쟁 기계 제작의 선구자였습니다. 이들의 공학적 역량은 당대 어떤 문명보다도 앞서 있었습니다.
영광과 몰락
이 시기 아시리아에는 사르곤 2세, 센나케리브, 에사르하돈, 그리고 그리스인들이 '사르다나팔'이라 부른 아슈르바니팔과 같은 위대한 왕과 정복자들이 배출되었습니다. 그러나 왕위를 둘러싼 끊임없는 내전은 제국의 힘을 서서히 소진시켰습니다.
마침내 메디아, 바빌로니아와 그들의 동맹군이 지칠 대로 지친 아시리아에 대해 대반란을 일으켰고, 기원전 612년 제국의 수도 니네베를 함락시켰습니다. 아시리아의 마지막 왕 신샤리슈쿤은 적이 궁전에 들어서기 직전 가족과 함께 스스로를 불태워 자결했습니다. 아시리아군의 잔존 세력은 하란으로 후퇴해 기원전 609년까지 저항을 이어갔지만, 결국 아시리아는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