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기원전 5세기 아테네 정치가 투키디데스가 고안한 정치 전술, 2500년 후에도 전 세계 의회에서 쓰이고 있다

기원전 449년, 아테네 함대 사령관이자 마라톤 전투의 영웅 밀티아데스의 아들 키몬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죽음은 아테네 귀족 진영에 커다란 공백을 남겼습니다. 기원전 461년부터 사실상 반대 세력 없이 아테네를 통치해 온 민주파의 지도자 페리클레스에 맞설 대체자를 찾아야 했던 것입니다.

귀족들이 선택한 인물은 투키디데스(Thucydides)였습니다. 키몬과 친척 관계, 정확히는 그의 처남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귀족으로, 훗날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남긴 동명의 역사가와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아테네 성벽 동쪽 바깥에 위치한 알로페케(Alopece) 데모스 출신으로,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 수 없지만 그곳이 그의 고향일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가 발탁된 배경은 분명했습니다. 귀족들은 페리클레스의 권력 균형을 잡고 그 세력을 약화시킬 인물이 절실했습니다. 플루타르코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들이 진짜 두려워한 것은 페리클레스가 군주처럼 군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 정치가 투키디데스가 고안한 정치 전술, 2500년 후에도 전 세계 의회에서 쓰이고 있다

플루타르코스는 투키디데스에 대해 군사적 재능에서는 키몬에 못 미치지만, 정치적 전술에서는 오히려 한수 위라고 평가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키몬과 달리 군사적 야망 없이 아테네에 상주하며 정치에만 몰두할 수 있는 인물이었는데, 이는 당시 정치가에게 결정적인 강점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당시 아테네 정치를 설명할 때 정당이라는 말을 쓰지만, 실제로 정당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 뚜렷한 파벌은 있었지만 그 이념적 노선은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상당히 분산되어 있었고, '정당'이라는 표현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관례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 정치가 투키디데스가 고안한 정치 전술, 2500년 후에도 전 세계 의회에서 쓰이고 있다

아테네 민주주의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 시민 집회에는 최대 6,000명에 이르는 시민이 모였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자신의 신념이나 충성 대상, 소속과 무관하게 집회장 곳곳에 흩어져 앉았다는 점입니다. 투키디데스는 이러한 방식이 자신 파벌의 응집력을 약화시킨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귀족과 과두제 지지자들이 한데 모여 앉아 나머지 세력과 뚜렷이 구분되도록 착석을 지시했습니다.

바로 여기서 그가 고안한 정치 전술이 탄생합니다. 같은 진영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앉아 하나의 그룹을 이루는 '당파별 집단 착석'입니다. 프랑스 혁명기를 거치며 확립된 현대 의회주의의 좌석 배치 관행은 바로 이 전술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이 방식을 통해 그는 한편으로는 거대한 세력의 시각적 임팩트를 연출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정치 세력을 체계적으로 조직하고 동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 정치가 투키디데스가 고안한 정치 전술, 2500년 후에도 전 세계 의회에서 쓰이고 있다

그러나 투키디데스는 웅변이나 정치적 수완에서 페리클레스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기원전 442년, 그는 도편 추방(오스트라키즘)으로 10년간 아테네에서 쫓겨나는 비운을 맞습니다.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에 담긴 암시에 따르면, 이 충격으로 그는 한동안 말 한마디 하지 못할 정도의 신경쇠약에 시달린 것으로 보입니다.

고대에 이미 쓰인 익명의 전기 투키디데스의 생애는 정치가와 역사가, 두 동명이인의 삶을 뒤섞어 놓은 흔적을 보입니다. 이 전기에 따르면 망명 후 그는 이탈리아 반도 남부의 투리이(Thurii)로 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투리이는 크로톤에 의해 파괴된 시바리스 자리에 아테네인들의 도움으로 재건된 도시로,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생애를 마감한 곳이기도 합니다. 만약 투키디데스가 그곳으로 갔다면 헤로도토스와 만났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아테네로 돌아왔는지, 아니면 망명지에서 생을 마쳤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일부 사료는 기원전 440년 사모스 전쟁 때 페리클레스, 하그논, 포르미온과 함께 함대를 지휘한 전략가로 그가 복귀했다고 전합니다. 그렇다면 그의 유배는 2년도 채 지속되지 않은 셈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함대 사령관이기도 했던 동명의 역사가의 이야기가 섞였을 개연성이 높습니다.

또 다른 전승은 그가 에기나 섬에서 불투명한 금융 거래에 손을 댔다고 주장하지만, 어느 쪽도 확인된 바는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있습니다. 개인적 성패와 무관하게, 그가 고안한 '집단 착석'이라는 정치 전술은 2500년이 지난 지금도 전 세계 거의 모든 의회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