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나폴레옹에 맞선 영웅적인 여관 주인, 안드레아스 호이퍼의 항쟁 (1809~1810)

나폴레옹에 맞선 영웅적인 여관 주인, 안드레아스 호이퍼의 항쟁 (1809~1810)

여관 주인에서 민중의 지도자로

안드레아스 호이퍼(Andreas Hofer)는 1767년 오스트리아 티롤(Tyrol) 지방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문은 여관을 운영했으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호이퍼가 가업을 물려받았습니다. 동시에 그는 와인과 말의 거래에도 종사하며 지역에서 신망을 얻었습니다.

1791년 호이퍼는 티롤 지방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티롤은 합스부르크 제국 안에서 자치적 지위를 누렸는데, 이는 주민들이 남다른 독립 정신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황제의 신하임을 자처하면서도, 중앙 행정부가 내정에 개입하는 것은 최소화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바로 이 독립 정신이, 얼마 지나지 않아 티롤 사람들이 프랑스와 바이에른 연합군에 맞서 벌인 놀라운 투쟁의 씨앗이 됩니다. 1805년 호이퍼는 저격수 자격으로 지역 민병대에 입대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사냥과 총기에 익숙해진 티롤 사람들은 오스트리아 군에 최고의 사수들을 공급했고, 이들은 정예 '사냥꾼' 부대를 이루었습니다. 호이퍼 역시 국민위병 대위까지 승진하며 지휘관으로 성장했습니다.

바이에른의 억압과 반란의 씨앗

그러나 전쟁은 오스트리아의 패배로 끝났고, 오스트리아는 티롤을 프랑스의 동맹국인 바이에른에 넘겨야 했습니다. 바이에른은 새로 통치하게 된 티롤 주민들의 관습과 풍습, 그리고 합스부르크 시절 지켜지던 규약조차 존중하지 않았고, 이는 티롤 사람들의 끓지 않는 적개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특히 바이에른이 티롤 주민들을 자국 군대에 강제 편입시키려 들자 반발은 전 지역으로 번졌습니다. 티롤 사람들은 혁명이 일어날 경우의 지원을 타진하기 위해 빈으로 대표단을 파견했고, 호이퍼도 그 일원으로 참여했습니다.

빈에서 돌아온 호이퍼는 봉기를 앞두고 동포들을 조직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1809년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간에 새로운 전쟁이 발발하면서 봉기의 기회가 열렸습니다. 1809년 4월 9일 봉기가 선언되었고, 곧 반군은 바이에른 수비대와 이에 개입하려던 프랑스군을 차례로 격멸했습니다.

베르기젤의 승리

4월 11일 반군은 체르칭(Zerzing)에서 바이에른군에게 대승을 거두고, 티롤의 최대 도시이자 수도인 인스브루크를 점령했습니다. 프랑스군과 바이에른군은 즉각 반격에 나섰지만 4월 13일 베르기젤(Bergisel) 전투에서 호이퍼에게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같은 시기 채슬러(Chasteler) 소장이 이끄는 소규모 오스트리아 분대가 반군을 지원하기 위해 긴행했습니다.

호이퍼는 보첸(Bozen)과 트렌트(Trient)를 해방하며 바이에른군을 곳곳에서 몰아붙였고, 이러한 연승 속에 티롤 사람들은 임시 정부를 수립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오스트리아 본군이 연패하면서 정규군이 티롤에서 철수했고, 반군은 홀로 남겨진 채 산악 지대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브레데(Brede) 장군이 지휘하는 바이에른군은 1809년 5월 19일 인스브루크를 재탈환했습니다.

그러나 호이퍼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투쟁의 지도권을 직접 쥐고 흩어져 있던 반군 집단들을 하나로 규합, 무려 2만 명의 전사로 이루어진 부대를 만들어냈습니다. 이 병력으로 두 번째 베르기젤 전투에서 바이에른군과 다시 맞붙었고, 전투는 거의 4일간 이어질 만큼 격렬했습니다.

결국 혁명군이 승리하여 인스브루크를 다시 해방했습니다. 그러나 7월 6일, 오스트리아 본군은 바그램(Wagram)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패배해 휴전을 요청했고, 그 결과 티롤은 다시 바이에른에 귀속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반군이 무기를 내려놓지 않자, 나폴레옹은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프랑스·바이에른 및 기타 독일 병력 4만 명을 파견했습니다.

희망 없는 싸움

수적으로 우세한 적에게 인스브루크는 다시 빼앗겼지만, 세 번째 베르기젤 전투에서 호이퍼는 12시간에 걸친 서사시적인 전투 끝에 티롤인들의 맹공으로 승부를 결정짓고 프랑스 원수 르페브르(Lefebvre)의 부대를 격파했습니다. 인스브루크는 또다시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쇤브룬(Schönbrunn) 강화조약은 티롤을 바이에른에 할양하는 것으로 확정되었습니다. 패전한 오스트리아 황제는 나폴레옹의 요구를 거스를 명분도 능력도 없었습니다.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 프랑스와 바이에른은 사면을 약속했고, 티롤 사람들은 마침내 무기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러나 호이퍼 자신은 진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곁에 남은 부하가 소수에 불과했던 그는 11월 15일 프랑스군에게 패배한 뒤 은신 생활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이웃 프란츠 라플(Franz Raffl)의 밀고로 배신을 당했고, 배신자는 부끄러운 짓의 대가로 1,500굴덴이라는 포상금을 챙겼습니다.

1810년 1월 28일 호이퍼는 이탈리아군에게 체포되어 포박된 채 만토바(Mantua)로 압송되었고, 군사법정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나폴레옹이 판사들에게 직접 유죄 판결을 요구하는 개입을 했다는 사실이 그 배경에 있었습니다.

처형장에서 호이퍼는 눈가리개를 쓰기를 거부하고 총살대를 정면으로 마주 보며 당당하게 섰습니다. 실제로 그는 한 하사에게 돈을 건네며 "제대로 조준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1810년 2월 20일 처형되었습니다.

영웅의 귀환, 배신자의 최후

1818년 오스트리아 황제는 호이퍼의 가문에게 귀족 작위를 하사했습니다. 1823년에는 그의 유해가 만토바에서 인스브루크로 옮겨져 영웅으로서의 예우를 받았습니다. 한편 그를 팔아넘긴 배신자 프란츠 라플은 1830년 바이에른에서 무일푼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도 기억할 만합니다.

나폴레옹에 맞선 영웅적인 여관 주인, 안드레아스 호이퍼의 항쟁 (1809~1810)
▲ 호이퍼와 그의 부하들

나폴레옹에 맞선 영웅적인 여관 주인, 안드레아스 호이퍼의 항쟁 (1809~1810)
▲ 안드레아스 호이퍼

나폴레옹에 맞선 영웅적인 여관 주인, 안드레아스 호이퍼의 항쟁 (1809~1810)
▲ 호이퍼의 처형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