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슬란카멘 전투는 1691년 세르비아 보이보디나 지역의 슬란카멘 마을 근교에서 벌어진 전투로, 대재상 쾨프륄리 파질 무스타파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과 '터키인의 루이'라 불리던 명장 바덴 변경백 루트비히 빌헬름이 지휘하는 신성로마제국군과 세르비아인 연합군이 맞붙은 결전이었다.
전쟁의 배경
1683년 빈 공방전에서 참패한 이후, 오스만 제국은 발칸 반도에서 주도권을 잃기 시작했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헝가리 전역에서 연전연승을 거듭하며 공세를 이어갔고, 1688년에는 베오그라드를, 1689년에는 보스니아까지 손에 넣으며 오스만 영토를 압박했다.
그러나 전세가 기울던 시점에 프랑스가 합스부르크 제국을 공격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황제는 서부 전선으로 관심을 돌릴 수밖에 없었고, 그 틈을 타 오스만 제국은 유명한 쾨프륄리 가문 출신의 대재상 파질 무스타파 파샤의 지휘 아래 다시 공세로 전환하며 상실한 영토를 되찾기 시작했다.
대재상의 지휘 아래 오스만군은 베오그라드와 해방되었던 세르비아 영토 대부분을 회복했다. 동부 국경의 위기감이 고조되자 합스부르크 제국은 오스만에 맞서 새로운 군대를 편성하기로 결정했고, 그 지휘권을 바덴바덴의 통치자이자 당대 최고의 명장으로 이름난 루트비히 빌헬름 폰 바덴에게 맡겼다.
양군의 충돌
제국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루트비히는 신속하게 세르비아 방면으로 진격하여 다뉴브 강과 티사 강이 만나는 지점에 도달했다. 그가 이끈 병력은 보병 56개 대대, 기병 116개 연대, 포 90문을 갖춘 총 5만 명이었다.
그러나 짧은 강행군으로 인한 피로와 질병, 그리고 여러 곳의 경비 병력 분산 배치 때문에 실제 전투에 투입 가능한 병력은 크게 줄어들었다. 전투 당일 제국군의 정규 병력은 3만 3천 명에 불과했으며, 이 가운데 2만 3천 명은 독일인이었고 나머지는 세르비아인이었다.
반면 대재상이 이끄는 오스만군은 기병 3만, 보병 7만, 대포 158문으로 구성된 약 10만의 대군이었다. 8월 17일, 루트비히는 자신의 병력의 세 배에 달하는 오스만군과 마주쳤다. 하지만 압도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오스만군은 공격에 나서지 않았고, 루트비히는 더 유리한 지형인 슬란카멘으로 후퇴하기로 결심했다.
결정적인 전투
제국군을 추격하던 대재상은 마침내 8월 19일 공격을 개시했다. 수적으로 우세한 오스만 기병대가 제국군 진영에 맹공을 퍼부으며 초기에는 적지 않은 압박을 가했다. 그러나 곧 독일군의 철저한 사격 규율과 월등한 훈련 수준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경포병의 밀접한 화력 지원을 받은 보병 대대들은 오스만군의 공격을 차례차례 격퇴했다. 루트비히는 자신의 기병대를 예비대로 남겨둔 채 침착하게 오스만군의 공세가 소진될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결정적 순간, 약 8천 명의 기독교 기병대가 오스만군의 측면으로 돌진했다.
선두에는 세르비아 및 크로아티아 경기병이 배치되고, 그 뒤를 따른 오스트리아 흉갑기병과 독일 기병·용기병들의 규율 있는 돌격에 오스만의 중기병과 경기병은 완전히 분쇄되었다. 자신의 기병대가 무너지는 것을 본 파질 파샤는 직접 말머리를 잡고 전선에 나섰지만, 그곳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지휘관의 죽음과 함께 오스만군의 사기는 완전히 붕괴했다.
대학살과 결과
이후 대학살이 벌어졌다. 패주하는 오스만 병사들은 공황 상태로 도주했고, 늑대 무리를 피해 내달리는 양떼처럼 수천 명의 오스만 병사들이 기독교 연합군의 검에 쓰러졌다.
전투가 끝났을 때, 평야는 수천 구의 오스만 병사 시체로 덮여 있었다. 오스만군의 전사자, 부상자, 포로를 합친 손실은 2만 5천 명을 넘어섰다. 반면 제국군의 전사자와 부상자는 8천 명에 달했는데, 이는 대부분 오스만군의 첫 공격을 막아낸 초기 전투 단계에서 입은 피해였다.
슬란카멘 전투는 대튀르크 전쟁(1683~1699)의 중요한 국면 중 하나였으며, 이 전쟁은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 체결로 기독교 연합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 조약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은 헝가리와 트란실바니아를 확정적으로 차지하게 되었고, 오스만 제국의 유럽 패권은 사실상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