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크로아티아 우스타샤의 '작은' 학살 수용소들... 지옥은 어디서나 지옥이었다

크로아티아 우스타샤의  작은  학살 수용소들... 지옥은 어디서나 지옥이었다

1941년, 우스타샤 정권과 첫 번째 학살 수용소

1941년 4월 말, 크로아티아의 파시스트 정권인 우스타샤(Ustaše)는 세르비아인, 유대인, 롬족을 수감하기 위한 최초의 학살 수용소를 설립했습니다. 불과 며칠 전인 4월 10일, 정권 수반 안테 파벨리치는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지원 아래 '독립 크로아티아 국가'의 수립을 선포한 바 있었습니다.

다니차 수용소: 14명당 반 킬로그램의 빵

4월 19일, 죄수 300명을 실은 첫 열차가 다니차(Danica) 수용소에 도착했습니다. 5월 중순에는 수용자 수가 열 배로 늘었고, 6월에는 9,000명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받은 배급은 14명당 반 킬로그램, 즉 조악하게 만든 빵 한 덩어리가 전부였습니다.

야도보 수용소: 울타리만 있는 학살장

이후 다니차 수용소가 폐쇄되는 과정에서 많은 수용자들이 살해되었고, 나머지는 야도보(Jadovno) 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 이곳은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구역일 뿐, 수용자를 위한 텐트조차 없는 곳이었습니다. 울타리 밖에는 목재 오두막 두 개만 세워져 있었는데, 하나는 소장용, 다른 하나는 감시병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본격적인 학살이 시작되었습니다. 수용자들은 수용소에서 5km 떨어진 협곡으로 끌려가 양떼처럼 도살되거나 쇠퇴봉으로 머리가 부서졌고, 시신은 그대로 협곡에 던져졌습니다.

7월 말까지 세르비아인, 유대인 등 '인종적 적'으로 규정된 1만 명 이상이 학살되었습니다. 8월 말 수용소 해체가 결정되었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수용자들 역시 살해되었습니다. 이곳에서 희생된 사람은 최소 3만 5천 명으로 추산되며, 일부 자료는 그 숫자를 7만 5천 명까지 추정합니다.

파그 섬 수용소: 이탈리아군마저 경악한 현장

달마티아의 파그(Pag) 섬에도 임시 수용소가 운영되었고, 최소 1만 명이 이곳에서 살해되었습니다. 8월, 무솔리니-파벨리치 합의에 따라 섬이 이탈리아에 넘어갔을 때, 이탈리아군조차 목격한 광경 앞에서 충격을 금치 못했습니다.

"손과 발, 머리가 묶여 있었습니다... 먼저 무덤을 팠고, 두세 명씩 묶인 죄수들은 총에 맞거나 칼에 찔렸습니다. 많은 이들이 산 채로 무덤에 던져졌습니다. 시신은 5~6겹으로 쌓여 있었습니다... 한 젊은 여성은 양쪽 가슴이 잘려 있었습니다... 다른 무덤에서는 여성과 아이들의 시신만 발견되었습니다."
— 이탈리아군 군의관의 증언

로보르그라드와 디아코보: 여성과 아이들을 향한 잔혹

로보르그라드(Loborgrad) 수용소에서도 한동안 여성과 아동 1,600명이 수감되었습니다. 살아남은 이들은 아우슈비츠로 보내져 학살당했습니다. 또한 몇 달간 운영된 디아코보(Đakovo) 수용소에도 주로 유대인, 그리고 소수의 세르비아인 여성과 아이들이 모여들었으며, 생존자들은 '발칸의 아우슈비츠'라 불리는 야세노바츠의 지옥으로 끌려갔습니다.

스타라 그라디슈카: 수녀들이 함께한 학살

스타라 그라디슈카(Stara Gradiška) 수용소에도 대부분 여성과 아이들이 갇혀 있었습니다. 특히 기억할 만한 사실은, 우스타샤 살인자들이 수감 관리를 맡으면서 로마 가톨릭 수녀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이 수용소는 1945년까지 운영되었으며, 그 기간 최소 7만 5천 명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참극은 '발칸의 아우슈비츠'라 불리는 야세노바츠(Jasenovac)에서 벌어진 비극에 비하면 고작 시작에 불과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