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판지르 VII 작전 – 1984년, 무자헤딘을 향한 소련의 대공세

판지르 VII 작전 – 1984년, 무자헤딘을 향한 소련의 대공세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1979년 소련은 1978년 쿠데타와 수상 암살 이후 자신들이 세운 흔들리는 공산주의 괴뢰 정권을 지원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소련의 침공에 아프간인들은 즉각 반응했고, 여기서 '무자헤딘(신앙의 수호자)' 반군 운동이 탄생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전략은 영토 전체의 점령이 아니라 도시, 전략 도로, 기반 시설을 우선적으로 장악하는 것이었다.

반군에 대한 주민들의 지지 기반을 차단하기 위해 소련군은 대규모의 폭력적인 인구 강제 이동을 단행했고, 마을을 불태우고 농작물을 파괴하는 것은 물론 화학 물질까지 살포했다.

판지르 계곡과 저항

소련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는 수도 카불 북서쪽에 위치한 판지르 계곡이었다. 이곳은 힌두쿠시 산맥의 끝자락에 해당하는 요충지였다. 1980년부터 1985년까지 소련은 이 계곡에서 반군을 분쇄하기 위해 무려 아홉 차례의 공세 작전을 감행했다.

판지르 계곡은 해발 3,878m의 살랑 고개를 통해 카불과 아프가니스탄 북부를 연결할 뿐 아니라, 당시 소련 영토였던 우즈베키스탄과도 이어지는 전략적 요새였다. 게다가 무자헤딘은 이 계곡을 통해 카불을 공격할 수 있었고, 실제로 잦은 매복 공격으로 소련군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1979년 6월, 아흐마드 샤 마수드가 판지르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카불에서 토목공학을 공부하던 그는 정권에 맞서는 정치 투쟁에 뛰어든 독실한 무슬림이었다. 겨우 26세의 나이로 판지르의 지휘권을 넘겨받은 그는, 부하들이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낡은 무기를 겨우 쓸 수 있는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정부군을 이 지역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성과 없는 작전이 거듭된 끝에, 소련군은 1984년 4월 19일 판지르에 대한 일곱 번째 공세를 개시했다.

판지르 VII 작전

1984년 2월, 소련 공산당(CPSU) 지도부에 변화가 일어났다.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대해 좀 더 유연한 접근을 주장하던 유리 안드로포프는 물러나고, 강경파 콘스탄틴 체르넨코가 지도부를 장악했다.

체르넨코는 아프가니스탄의 괴뢰 지도자 바브라크 카르말과 마찬가지로, 무자헤딘이 근절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에 따라 아프가니스탄에서 작전 중이던 소련 제40군에 판지르를 다시 공격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새로운 공세는 무자비해야 하며 결정적인 결과를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었고, 카르말에 따르면 그 목표는 반군 거점은 물론 계곡에 사는 주민들마저 섬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작전의 전체 계획이 새어 나갔다. 안드로포프를 지지하던 소련 관리들 또는 아프간 정부 내부의 첩자를 통해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덕분에 마수드는 다가올 공세에 관한 모든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민간인 피해를 피하기 위해 마수드는 계곡에 남아 있던 약 3만 명의 주민에게 안전 지역으로 이동할 것을 명령했다. 계곡에는 전투 병력만 남아 적을 기다렸다. 모든 도로와 활주로로 쓸 수 있는 지역에는 지뢰가 매설되었고, 모든 가옥에는 부비트랩이 설치되었다.

소련의 계획은 항공기 200대와 그만큼의 헬리콥터의 지원을 받는 소련군 1만 1,000명과 아프간군 2,600명으로 계곡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총지휘는 소련 원수 세르게이 소콜로프에게 맡겨졌으며, 소련의 목표에는 마수드의 제거도 포함되어 있었다.

공세 개시

Su-24 공격기와 Tu-16, Tu-22M 중형폭격기의 격렬한 폭격이 진행된 직후, 소련군이 진격했다. 공격 부대의 핵심은 제108차량화소총사단이었다.

동시에 제103근위공수사단 일부와 공수부대, 차량화보병 부대, 그리고 정예 스페츠나츠 요원들이 투입되었다. 아프간군은 제8·20보병사단과 제37특수부대 여단에서 파견되었다.

활주로 확보와 수직 기동을 통해 소련군은 적의 탈출로를 차단하려 했다. 동시에 계곡과 인접 계곡에 강력한 거점 구축을 시작했다. 소련군의 이러한 새로운 전술적 접근은 처음에는 효과를 보는 듯했다.

그러나 소련군이 구축한 거점들은 공중 보급으로만 유지될 수 있어 결국 버티지 못했다. 소련군은 계곡의 대부분을 점령했지만, 그곳에 머물 수는 없었다.

소탕 작전 과정에서 소련군은 반군이 설치한 함정으로 인해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양측의 정확한 피해 규모는 알려져 있지 않다. 소련은 공식적으로 1984년 한 해 동안 아프가니스탄에서 자국 군인 2,060명이 전사했다고 인정했다.

실제 숫자는 아마도 더 높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손실의 상당 부분은 1984년 9월까지, 즉 거의 5개월간 이어진 판지르 작전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자료에 따르면 제682차량화대대만 해도 4월 30일 하자라 지역 소탕 작전에서 사망 60명, 부상 60명이라는 큰 피해를 입었다. 반군의 피해 역시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들은 '정치적' 부담 없이 얼마든지 충원 가능한 존재였다.

실패

결국 소련이 채택한 교두보 전략으로는 계곡에 대한 영구적인 통제를 확보할 수 없었다. 주력부대가 겨울철을 맞아 철수하자 곧바로 반군이 재진입했다. 미국제 스팅어 휴대용 지대공 미사일이 반군의 손에 들어가면서, 거점에 대한 항공 보급 비용은 소련 공군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치솟았다.

결국 소련은 계곡을 최종적으로 통제하지 못해 전략적으로 실패했을 뿐 아니라, 마수드와 그의 반군을 섬멸하지 못함으로써 전술적으로도 실패했다.

판지르 VII 작전 – 1984년, 무자헤딘을 향한 소련의 대공세

무자헤딘 반군들. 영국제 2차 세계대전 소총을 들고 있다.

판지르 VII 작전 – 1984년, 무자헤딘을 향한 소련의 대공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