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히로시마 내 사랑… 재앙의 대명사가 된 소련 핵잠수함 K-19

히로시마 내 사랑… 재앙의 대명사가 된 소련 핵잠수함 K-19

소련 해군은 1958년,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는 최초의 탄도미사일 잠수함 건조에 착수했습니다. 이 배는 같은 해 10월 17일 진수되었고, 훗날 러시아·소련 해군 역사상 가장 어두운 장면 중 하나를 남기게 됩니다.

급조된 첫 핵미사일 잠수함

이 함선은 658형(나토 코드명 호텔 I)의 1번함이었습니다. 1959년에 편입되어 1960년 정식으로 실전 배치되었으며, 배수량 5,500톤, 길이 114m, 폭 9.2m, 승무원 104명 규모에 두 개의 원자로로 추진되었습니다.

수상 최대 속력은 18노트, 수중에서는 26노트를 냈습니다. 함교 후방에 세 발의 R-13 탄도미사일(나토 코드명 SS-N-4 샤크)을 수직으로 장착했으며, 사거리는 약 650km에 달했습니다.

여기에 21인치 어뢰발사관 4문과 16인치 어뢰발사관 4문을 갖추었고, 이론상 최대 300m까지 잠항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사일을 발사하려면 반드시 수상으로 부상해야 했고, 부상 후 발사 준비에 약 12분이 걸렸습니다.

건조 상태는 좋지 못했습니다. 미국의 해군력에 맞서기 위해 소련이 탄도미사일 잠수함 함대를 서둘러 만들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K-19의 초대 함장 니콜라이 자타예프 본인조차 이 배가 실전 배치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할 정도였습니다.

진수식부터 따라다닌 불길한 그림자

이 배는 진수식부터 '불운한 배'라는 소문을 안고 세상에 나왔습니다. 진수식에서 깨뜨리던 샴페인 병이 끝내 깨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미사일 장전 작업 중에는 한 작업자가 발사 구획의 수밀문에 깔려 그대로 목숨을 잃었고, 건조 과정의 화재로 두 명이 산 채로 불타 죽었으며, 방수 실런트를 바르던 여섯 명이 유독가스에 질려 사망했습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1960년 1월 시험 항해 중 승무원의 조작 실수로 원자로 하나가 고장 났습니다. 해상 시험 중에는 급부상 직후 선체 외피가 통째로 벗겨져 나갔고, 300m 심도 잠항 중에는 원자로 격벽으로 해수가 유입되었습니다.

자타예프 함장은 즉시 부상을 명령했고, 물을 머금고 기울어진 채 배는 간신히 항구로 귀환했습니다. 원인은 제조 결함으로 밝혀졌습니다. 같은 해 10월에는 갤리(주방)에서 화재가 발생해 제9격벽이 3분의 2까지 침수되는 사고가 또다시 일어났습니다. 기적적으로 인명 피해는 없었습니다. 12월에는 냉각 계통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럼에도 1961년 6월 18일, 이 '떠다니는 죽음'은 전문 요원이 추가된 139명의 승무원과 함께 첫 임무에 나섰습니다.

북대서양의 방사능 누출

7월 4일, 북대서양을 항해 중이던 이 배에서 방사능 누출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원인은 원자로 시험 당시의 실수로 추정됩니다. 내압 한계가 200기압인데도 압력이 400기압까지 치솟았다는 것입니다.

당시 관계자는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지만, 아마도 자신의 안전이 걱정되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누출은 원자로 주냉각계통의 압력 조절기에서 시작되었고, 급격한 압력 강하로 보조 계통마저 멈추고 말았습니다.

결국 원자로를 식히던 냉각수가 끓기 시작했고, 한 원자로 격실의 온도는 섭씨 800도까지 올라갔습니다. 곧바로 화재가 발생했고, 불은 껐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그대로 남았습니다.

자타예프 함장은 즉각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상황을 파악했을 때 선택지는 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누출을 막으려면 승무원들이 직접 원자로 격실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잠수함의 폭발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지만, 그곳에 들어간 사람이 살아남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결국 여덟 명의 용사가 자원해 잠수함의 식수 비축분을 활용해 문제를 해결했고, 그들은 치명적인 수준의 방사선에 노출되었습니다. 이후 인근으로 온 재래식 잠수함이 승무원들을 옮겨 실었으며, K-19는 미국 측의 지원 제안을 거절한 채 기지로 예인되었습니다.

끝까지 이어진 죽음

며칠 안에 여덟 명 모두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방사능에 노출된 것은 이들뿐이 아니었고, 이후 2년 동안 승무원 15명이 더 사망했습니다. 2년에 걸친 수리 작업을 수행한 정비 요원들 역시 방사능 피폭을 입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잠수함은 수리를 마치고 호텔 II급으로 개조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불행은 계속되었습니다. 1969년에는 수중에서 미국 잠수함 USS 가토와 충돌했고, 1972년에는 더 큰 참사가 찾아왔습니다. 배에서 화재가 발생한 것입니다. 일부 자료는 참사의 원인이 화재가 아니라 새로운 방사능 누출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어쨌든 이 사고로 30명의 승무원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소련 당국은 K-19에서 벌어진 모든 일을 철저히 은폐했습니다. 진실은 소련 붕괴 이후에야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당국은 배를 수리해 다시 현역으로 복귀시키라고 명령했을 뿐입니다.

1991년 프라우다는 1972년 사고 역시 방사능 누출 때문이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 배는 1990년에야 마침내 퇴역했습니다. 승무원들이 이 배를 '히로시마'라고 불렀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또 다른 별명은 '과부 제조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