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7년 알불레나(Albulena) 전투는 발칸 여러 민족이 튀르크(오스만) 세력에 저항한 투쟁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승리 중 하나로 꼽힌다. '스칸데르베그'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조르지오 카스트리오티스(Georgios Kastriotis)는 수년간 오스만 제국과 싸워 온 인물이었다. 그러나 1457년 그은 극심한 압박 속에 놓여 있었고, 심지어 조카이자 휘하 장군이었던 함자 카스트리오티스(Hamza Kastriotis)마저 그를 배신하고 적진으로 넘어가는 위기를 맞는다.
5만~8만 대군의 남진
1457년 5월 말, 이작 에브레노스 베이(Izak Evrenos Bey)와 배신자 함자 카스트리오티스가 지휘하는 강력한 오스만 군대가 진격을 개시했다. 사료에 따라 병력은 5만에서 8만에 달했으며, 그 임무는 카스트리오티스의 저항을 완전히 분쇄하는 것이었다. 반면 카스트리오티스가 동원할 수 있었던 병력은 고작 1만 명을 넘지 못했고, 다른 사료들은 7천~8천 명 수준으로 추정한다.
오스만 군대는 오늘날의 스코페(Skopje)에서 출발하여 여러 방진으로 나뉘어 전진했다. 카스트리오티스 역시 험준한 지형과 울창한 숲을 활용해 적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 자신의 군대를 여러 부대로 나누어 대응했다.
'사라진' 적을 찾아 헤매는 오스만군
그러나 카스트리오티스는 곧 후퇴한 뒤 홀연히 모습을 감췄다. 오스만 군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을 찾아 방황하면서도, 게릴라 전사들의 관례대로 학살과 약탈을 자행했다. 카스트리오티스와 그의 병사들은 7월과 8월 내내 산속에 은신하며 안전을 유지했고, 심지어 부하들이 그를 버리고 도망쳤으며 본인도 베네치아로 피신했다는 소문까지 퍼뜨렸다.
이 모든 것은 철저한 기만 작전이었다. 정면 대치전으로는 압도적인 오스만 대군과 맞설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오스만군은 위험한 적을 이미 무력화했다고 확신하며 알불레나 지역에 진영을 구축하고 있었다.
9월 2일, 기습의 개시
그러나 카스트리오티스는 결코 방심하지 않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457년 9월 2일, 그는 정예 호위병과 함께 오스만 진영에 접근해 외곽 경비대를 제거했다. 하지만 한 명의 튀르크 병사가 살아남아 진영에 경보를 울렸고, 카스트리오티스는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이 즉각적인 총공격을 명령했다.
그는 부하들에게 최대한 큰 함성과 소음을 내라고 지시하며 공격을 개시했다. 오스만군은 반응할 시간조차 없었다. 기습을 당은 그들은 자신들이 훨씬 강대한 병력의 공격을 받고 있다고 믿었고, 에브레노스와 함자가 어떻게 병력을 재정비하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혼돈 속으로 무너지는 오스만 대군
공황 상태에 빠진 오스만군은 카스트리오티스의 경기병대에게 뒤쫓기며 진영 중앙으로 밀려났다. 이윽고 오스만 군대는 기동조차 할 수 없는 무리로 붕괴했고, 그들에게 남은 선택은 아수라장 속의 무질서한 도주뿐이었다. 에브레노스는 간신히 탈출에 성공했지만, 배신자 함자는 삼촌 카스트리오티스에게 직접 생포되었다. 다만 그가 마땅히 받았어야 할 응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오스만군의 피해는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일부 사료는 3만 명이 전사했으며, 그 대부분은 지휘 계통의 붕괴로 인한 혼란과 공포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기록한다. 다른 사료들은 사망자를 1만 5천 명으로 추산한다. 여기에 수천 명이 포로로 잡혔고, 24개의 군기와 막대한 양의 전리품도 노획되었다. 반면 카스트리오티스 군의 피해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지만, 전투가 일방적으로 전개된 과정을 고려하면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