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다페스트 포위전과 '콘라드' 작전
1944년 10월 29일, 소련군은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를 향한 공격을 개시했고, 같은 해 12월 24일에는 마침내 도시를 완전히 포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독일군과 동맹인 헝가리군은 포위말을 돌파하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부다페스트 포위말을 풀기 위한 노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코드명 '콘라드(Konrad)'로 불린 일련의 작전들이었으며, 그중에서도 '콘라드 III' 작전이 결정적인 의미를 지녔습니다.
양측의 병력 배치
주공을 담당한 것은 헤르만 발크(Hermann Balck) 대장이 지휘하는 독일 제6군이었으며, 선봉은 SS 제4기갑군단과 제3기갑군단이 맡았습니다. SS 제4기갑군단은 SS 제3기갑사단 '토텐코프(Totenkopf)'와 SS 제5기갑사단 '비킹(Wiking)', 그리고 중전차 대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제3기갑군단 산하에는 제1·제3기갑사단이 배속되어 있었습니다.
독일 제6군과 맞선 병력은 페오도르 톨부힌(Fyodor Tolbukhin) 원수가 지휘하는 소련 제3우크라이나 전선군이었습니다. 특히 SS 제4기갑군단의 정면에는 소련 제4근위군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기습의 성공
독일군은 1945년 1월 18일 공격을 개시하며 전술적 기습에 성공했습니다. 이 전투에 독일군은 약 400대의 전차를 투입했습니다. 반면 소련 제4근위군은 이전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어 가동 가능한 전차가 약 250대에 불과했고, 무엇보다 정면에 정예 SS 제4기갑군단이 나타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덕분에 독일군의 공격은 순조롭게 전개되었습니다.
단 이틀도 지나지 않아 두 개의 SS 기갑군단은 소련군 방어선을 붕괴시키고 소련군 두 개 군단(제18전차군단과 제130군단)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포위된 부대를 구출하려던 소련군의 역습 역시 독일군에 의해 좌절되었습니다.
그러나 독일군에게는 포위된 소련군을 '봉쇄'할 충분한 보병이 없었고, 결국 포위됐던 소련군은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의 공격은 소련 방어선에 폭 30km에 달하는 거대한 돌파구를 열어 놓았습니다.
부다페스트까지 단 25km
공군의 지원을 받은 독일군은 진격을 계속해 사실상 부다페스트로 통하는 길을 열었고, 1월 22일에는 세케슈페헤르바르(Székesfehérvár)를 점령했습니다. 톨부힌 원수는 독일군이 부다페스트에 닿지 못하도록 강력한 병력을 투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련 원수는 돌파구를 막기 위해 제5기병군단을 투입했습니다. 이 군단은 전차 100대와 더욱 중요하게는 수백 문에 달하는 야포와 대전차포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독일군의 진격 속도를 늦추는 데 성공했습니다. 물론 이는 당시 독일군이 누적된 손실과 피로, 그리고 무엇보다 심각한 연료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소련군은 여기에 제1기계화군단까지 전장에 투입해 독일군의 진격을 더욱 지연시켰습니다. 그럼에도 1월 26일, 제3기갑군단은 부다페스트에서 불과 25km 떨어진 지점까지 육박했고, SS 제4기갑군단은 포위된 수비군과 무선 교신을 확립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실패, 그리고 책임
하지만 모든 것이 바로 이 지점에서 끝나고 말았습니다. 충분한 보병이 없어 기갑부대가 돌파한 지점을 엄호할 수 없었고, 누적된 손실과 연료난, 그리고 계속 늘어나는 소련군 병력에 직면한 발크는 결국 후퇴를 명령했습니다. 이 결정에 SS 제4기갑군단 사령관 헤르베르트 길레(Herbert Gille)는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발크의 판단은 옳았습니다. 그리고 이 작전 실패의 책임은 다름 아닌 히틀러에게 있었습니다. 그는 참모진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제2기갑군의 공격 참여를 거부했습니다. 만약 발크의 부대가 적절히 증원되었다면 소련 제3우크라이나 전선군은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었을 것이고, 부다페스트도 구원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1월 27일, 톨부힌은 발크가 예견했던 대로 SS 제4기갑군단을 포위 섬멸하려는 역습을 감행했습니다. 그러나 독일군은 가동 가능한 전차가 50대 남짓으로 줄어든 상황에서도 버텨냈습니다. 실제로 소련군은 단 하루 만에 제23전차군단이 사실상 궤멸하는 등 100대 이상의 전차를 잃는 막대한 손실을 치렀습니다.
그럼에도 소련군의 압도적인 물량 우위를 독일군이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2월 1일까지 독일군은 공세로 확보했던 영토 대부분을 다시 내주어야 했고, 부다페스트의 운명은 최종적으로 봉인되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