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전투는 공식적인 종전보다 앞서 시작되었지만, 종전 이후에도 여러 날 동안 계속되었다. 정당한 복수의 기운이 짙게 배어 있던 특히나 처절한 전투였다. 그러나 이 전투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데, 그 이유는 전후 이 나라를 지배한 정권이 정치적 이유로 역사의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잊혀진 최후의 격전지, 오자크
오자크(Odžak)는 현재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위치한 크로아티아 국경 인근의 작은 도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 도시는 안테 파벨리치와 우스타샤의 학살 근거지였던 크로아티아 독립국에 속해 있었다. 1945년 4월, 전세가 기울었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베를린은 소련군에게 포위되었고 추축국은 완전히 붕괴한 상태였다. 죄를 지은 자들이 목숨을 부지하려 발버둥 치던 시기였다. 크로아티아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우스타샤 범죄자들은 탈출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페타르 라이코바치치(Petar Rajkovačić)와 같은 광신도들도 있었다. 티토의 게릴라(파르티잔)에게 쫓기던 그는 약 1만 명의 병력과 함께 오자크와 주변 여러 마을에 진지를 구축하고 끝까지 싸울 준비를 갖추었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약 1,800명만이 진지에 남아 최후까지 저항했다.
크로아티아군은 보스니아 강과 사바 강 사이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필연적으로 게릴라들은 한 방향에서 그들을 공격할 수밖에 없는 형국이었다. 한편 티토의 군대는 전차로까지 증강된 상태였다.
실패한 공격
게릴라의 공격은 4월 19일 티토 제3게릴라군단 소속 제27사단의 선봉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공격이 4월 28일까지 계속되었음에도 게릴라들은 참패를 당했다. 해당 사단의 제16여단은 지휘관 스파소 미시치(Spaso Mišić)를 포함해 600명 이상이 전사하는 궤멸적 피해를 입었다. 게릴라 대대 하나가 통째로 궤멸되었고, 크로아티아군은 여러 문의 대포와 박격포, 대전차포를 노획했다.
이후 제28사단과 제53게릴라 사단이 전투에 투입되었다. 이 부대들의 압박 속에 크로아티아군의 외곽 방어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결국 크로아티아군은 블라스카 말라(Vlaška Mala) 마을까지 밀려났고, 일부가 항복했지만 무기를 내려놓자마자 게릴라들에게 학살당했다. 이 소식을 접한 나머지 병력들은 문자 그대로 죽음을 각오하고 필사적으로 싸웠다.
탄약이 바닥난 크로아티아군은 모든 총알이 헛되지 않도록 게릴라들이 불과 10m 이내로 접근할 때까지 사격을 참았다. 수많은 게릴라가 쓰러졌고, 부상을 입어 적의 손에 넘어간 자들은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자비란 없는 전투였다.
게릴라들은 적의 주 방어선을 향해 공격을 이어갔고 드디어 오자크 시내에 진입했다. 그러나 라이코바치치는 5월 초 성공적인 반격을 감행했다. 이런 사태를 예상하지 못한 게릴라들은 기습을 당해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방어선은 무너졌고 부대들은 도주했다.
크로아티아군은 폐허가 된 도시를 탈환하며 게릴라 제20세르비아 돌격여단의 병력 다수를 살해했다. 살아남은 세르비아인들은 문자 그대로 눈앞에 마주치는 모든 이를 학살하기 시작했다. 한편 이브라힘 후주로비치(Ibrahim Hujdurović) 휘하의 우스타샤 부대는 게릴라 제14여단을 격파하고 주변 산악 지대로 탈출해 그곳에서 3개월간 더 게릴라전을 벌였다.
티토의 명령: "어떤 수를 써서라도 도시를 점령하라"
한편 크로아티아군의 장기 저항은 티토를 극도로 불편하게 만들었다. 결국 공군의 지원을 받는 총공격이 명령되었고, 재편성된 제27사단이 다시 선봉에 섰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도시를 점령하라. 인명 손실은 문제 삼지 않는다"는 것이 티토의 명령이었다.
소련제 카츄샤 로켓포로 무장한 게릴라들은 기세 좋게 공격을 감행했지만 또다시 격퇴당했다. 뚜렷한 성과 없이 공격이 공격을 거듭했다. 5월 23일, 게릴라 항공기 두 개 편대가 크로아티아 진지에 대한 폭격과 기총소사를 시작했다.
라이코바치치는 포격으로 두 차례 부상을 입었다. 방어선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에 라이코바치치는 부하들에게 5월 24일 밤부터 25일 새벽 사이에 포위망 돌파를 시도하라고 명령했다. 700명의 크로아티아 병력이 게릴라의 방어선을 뚫고 탈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니우차 스탈라(Nuića Štala)에서는 수많은 크로아티아인들이 포위되어 끝까지 싸우다 죽었다. 게릴라들은 그곳의 병원에까지 뛰어들어 우스타샤든 민간인이든 발견하는 대로 모두 살해했다.
탈출에 성공했던 700명의 크로아티아인들 역시 곧 포위되어 무기를 내려놓도록 강요당했다. 일부는 간신히 빠져나갔다. 오자크에서 게릴라들은 15세 이상의 남성을 모두 처형했고, 어린이들마저 살해당했다. 탈출에 성공한 마지막 크로아티아인들은 주변 산악 지대에서 1947년까지 저항을 이어갔지만 결국 궤멸되었다. 전체적인 피해는 매우 컸다. 게릴라 측은 수천 명이 사상당했고, 크로아티아군은 완전히 궤멸당했다. 라이코바치치는 체포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역사 속에서 지워진 '침묵'
티토 정권은 이 전투를 언급하는 것조차 엄금했다. 이 전투는 "유고슬라브 민족의 형제애적 단결에 대한 음모"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 전투에 관한 첫 번째 공개 보도는 무려 30년이 지난 1975년에야 세르비아 신문 NIN을 통해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