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키예프 '죽음의 경기' 77년: 나치 점령 아래 우크라이나 선수들의 승리와 비극

키예프  죽음의 경기  77년: 나치 점령 아래 우크라이나 선수들의 승리와 비극

1942년 8월 9일, 나치 독일의 점령 하에 있던 키예프에서 역사에 남을 한 번의 축구 경기가 열렸다. 디나모 키예프 소속 선수 8명과 로코모티브 키예프 소속 선수 3명으로 구성된 우크라이나 팀 '스타르트(Start)'는 독일군으로 구성된 '플라켈프(Flakelf)'와 맞붙었고, 이 대결은 훗날 '죽음의 경기(The Death Match)'로 불리게 된다.

빵공장 강제 노동 속에서 다시 태어난 팀

독일군이 키예프를 점령하면서 우크라이나의 기존 축구팀들은 모두 해체되었다. 일자리를 잃은 선수들은 생계를 위해 키예프의 한 빵공장에서 강제 노동에 동원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1942년 여름, 이들은 '스타르트'라는 이름의 축구단을 다시 결성했고, 키예프 방공포 부대에 복무하는 독일 군인들로 구성된 팀 '플라켈프'와 대결하게 되었다.

전반 3-1, 그리고 최종 스코어 5-3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스타르트는 전반전만에 3-1로 두 골 차 승기를 잡았다. 당시 널리 알려진 이야기에 따르면, 후반전 시작 전 잘 차려입은 한 신사가 우크라이나 선수단 탈의실을 찾아와 정중하게 패배를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스타르트 선수들은 오히려 더 많은 득점을 노리고 필드에 나섰고, 경기는 5-3 완승으로 끝났다.

승리의 대가, 그리고 음모론

문제는 경기 이후에 시작되었다. 독일군은 패배를 쉽게 잊지 않았고, 스타르트 선수 대부분은 고문 끝에 강제수용소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것이 오랫동안 통설로 받아들여져 왔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각종 음모 시나리오가 등장한다.

1990년대 말, 이 사건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언론인과 역사학자들은 흥미로운 결론에 도달했다. 당시 선수들이 탈의실에서 협박받았다는 증거는 없으며, 심판이 친위대(SS) 소속이었다는 주장 역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독일 측은 패배를 인정하고 상대 팀에게 축하를 보냈다는 기록도 확인되었다. 또 다른 역사학자는 우크라이나인과 독일인 간의 축구 경기 자체가 당시 흔한 일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경기 10일 뒤, 체포와 처형

확실한 사실은 하나 있다. 경기가 끝난 불과 10일 뒤, 스타르트 소속 선수 9명이 점령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고, 그중 상당수가 처형되거나 강제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점령 당국은 이들을 '간첩'으로 규정했다. 오늘날 키예프에는 이들의 희생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 앞을 찾는다.

출처: SK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