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5년 6월 18일 벌어진 페르벨린 전투는 규모로 보면 크지 않은 전투였다. 당시 초강대국 스웨덴과, 훗날 프로이센으로 성장할 브란덴부르크 공국 사이의 작은 충돌이었다. 그러나 이 전투가 지닌 정치적 의미는 실로 막대했다. 바로 이날이 '새로운 프로이센'의 탄생일이자, 프로이센과 독일 군국주의의 기원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배신당한 동맹
스웨덴과 브란덴부르크는 오랫동안 동맹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가 네덜란드를 침공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합스부르크 황제 편에 섰고, 자신의 군대를 신성 로마 제국 측에 보내 프랑스와 싸우게 했다.
루이 14세는 거액을 약속하며 스웨덴을 부추겨 브란덴부르크를 공격하게 만들었다. 프로이센군이 제국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스웨덴은 실제로 침공했고, 별다른 저항 없이 공국 영토의 상당 부분을 점령했다. 이 소식이 선제후에게 전해진 것은 1674년 12월이었다.
기록적인 강행군
선제후는 즉시 최대한 빠르게 침략자를 몰아내기로 결심했다. 그는 수송대와 대부분의 보병을 남겨두고, 당시 기준으로 놀라운 기록인 2주 만에 250km를 행군하여 마그데부르크에 도달했다. 이 같은 속도에 스웨덴군은 크게 놀랐다.
라테노우 함락 작전
소규모 작전 이후, 선제후는 총사령관 게오르크 폰 데어플링거 원수에게 스웨덴이 점령한 라테노우 탈환을 명령했다. 선제후는 도시의 충성스럽고 부유한 주민 한 사람에게 스웨덴 장교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해 술을 잔뜩 마시게 하라고 지시했다.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었고, 6월 14일 저녁 프로이센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데어플링거가 이끈 병력은 8,000명뿐이었고, 그중 7,000명이 기병과 용기병(당시에는 말을 탄 보병)이었다. 운도 프로이센군을 도왔다. 갑작스럽고 강력한 여름 폭풍우가 몰아친 것이다. 스웨덴군과 함께 싸운 경험이 있어 스웨덴어를 구사할 줄 알았던 69세의 오스트리아 출신 개신교도 데어플링거는 성문 앞에 다가가 경비병들이 자신을 스웨덴인으로 믿게 만들었다!
경비병들은 성문을 열었고, 즉시 1,000명의 프로이센 용기병이 몰려들어 문을 강탔다. 다른 프로이센 병사들이 뒤따랐다. 스웨덴 장교들은 취한 채 포로로 잡혔고, 수비대 전체가 단 한 발의 총성도 없이 항복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도시 함락 소식을 들은 노련한 스웨덴 사령관 발데마르 브랑엘 장군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하벨 강의 지류와 늪지대가 많은 하벨베르크 지역으로 후퇴했다. 이어서 더 동쪽인 페르벨린으로 물러났다.
프로이센군의 병력을 알지 못한 채 추격당하던 브랑엘은 페르벨린에서 하벨 강 지류의 무너진 다리 앞에 서게 되었다. 다리 좌우는 늪지대, 앞은 프로이센군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그는 강을 등지고 데어플링거가 제안한 결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브랑엘은 공병들에게 탈출을 위해 다리 수리를 명령했다.
스웨덴군은 병력 11,000명과 대포 28문으로, 프로이센군 7,000명과 대포 13문에 맞섰다. 무엇보다 스웨덴군은 불패의 명성을 지니고 있었고, 위대한 국왕 구스타브 아돌프의 이름만으로도 독일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데어플링거는 좁은 지형 탓에 스웨덴군이 우세한 병력을 제대로 전개하지 못하고 곤란에 처한다는 점을 간파했다. 그는 인근 언덕에 대포를 배치하고 "발포"를 명령했다.
6월 18일, 전투의 시작
6월 18일 정오 무렵, 프로이센군의 포성이 전투 시작의 신호가 되었다. 브랑엘은 언덕을 공격해 프로이센 포병을 침묵시키려 했으나 프로이센 기병에게 격퇴당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친히 이끄는 프로이센 기병이 역공을 감행해, 그동안 패배를 모르던 스웨덴 기병을 완전히 격파했다.
프로이센군은 이어 스웨덴 보병 연대마저 붕괴시켰다. 한편 스웨덴 공병들이 임시로 다리를 수리하는 데 성공했고, 브랑엘은 내려앉는 밤을 틈타 병력 대부분을 북쪽으로 철수시킬 수 있었다. 이는 스웨덴군이 통과하던 도시를 포격하지 않겠다는 선제후의 결정 덕분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백성을 죽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승리의 의미
승리한 프로이센군의 사상자는 약 500명이었다. 스웨덴군의 손실은 이보다 약간 많은 약 600~700명의 사상 및 포로였다. 이후 며칠간 프로이센군의 추격과, 침공 당시 스웨덴군의 파괴와 약탈을 잊지 못한 프로이센 농민들의 매복 공격으로 스웨덴군의 손실은 배로 불어났다. 단 이틀 동안만 최소 1,500명의 스웨덴 병사가 추가로 잃었다.
7월 2일까지 프로이센 영토에는 생포되지 않은 스웨덴 병사 한 명 남지 않았다. 페르벨린에서의 프로이센 승리는 즉각적인 정치적 결과를 낳지는 않았다. 그러나 심리적 효과는 어마어마했다. 스웨덴 불패의 신화를 산산조각 냈고, 그때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프로이센의 군사적 자긍심을 일깨웠다. 몇 년 뒤 페르벨린에서 승리한 그 군대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실레지아 전쟁, 7년 전쟁에서 유럽 전장을 지배하게 되었고, 작은 프로이센을 '새로운 스파르타', 유럽의 강대국으로 변모시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