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잠든 적을 무찌르다: 30년 전쟁의 전환점, 투틀링겐 기습전

잠든 적을 무찌르다: 30년 전쟁의 전환점, 투틀링겐 기습전

30년 전쟁: 유럽을 유린한 최악의 참화

30년 전쟁(1618~1648)은 야만족의 대이동 이후부터 나폴레옹 전쟁 이전까지 유럽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전쟁으로 평가받습니다. 흔히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종교 전쟁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종교 갈등은 어디까지나 전쟁의 명분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가톨릭 국가였던 프랑스는 오히려 개신교 진영 편에 서서, 같은 가톨릭 국가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신성로마제국과 바이에른, 스페인과 맞섰습니다. 위대한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아돌프가 전사한 후에도 스웨덴의 개입 덕분에 합스부르크에 맞서는 세력은 거의 승기를 잡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643년 겨울, 단 한 번의 전투가 전쟁의 향방을 좌우할 뻔했습니다.

투틀링겐의 기습

1643년 11월 초, 두 개의 적대 군대가 현재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일대에서 기동 중이었습니다. 덴마크 출신 장군 요시아스 란차우(Josias Rantzau)가 지휘하는 프랑스-독일 연합군은 1만 8천 명, 상대인 제국군은 프란츠 폰 메르시(Franz von Mercy) 원수 휘하에 1만 5천 명이었습니다.

메르시의 부대는 스페인, 바이에른, 로렌 출신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군대들은 겨울철이 되면 작전을 중단하고 미리 마련된 야영지나 도시에서 월동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프랑스-독일군을 지휘하던 덴마크 장군은 11월이 된 만큼 부대를 쉬게 하기 좋은 시기라 판단하고 투틀링겐(Tuttlingen) 일대에 주둔하기로 했습니다.

투틀링겐은 다뉴브 강변에 자리한 작은 마을로, 현재의 독일-스위스 국경 근처에 있습니다. 란차우는 인근 밀린겐, 밀하임, 메링엔 등의 마을에도 수비대를 배치한 뒤, 봄이 오면 작전을 재개하기만을 조용히 기다렸습니다. 란차우는 전략적 재간보다는 용맹함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틈을 노려, 폰 메르시는 잠든 적을 기습하기로 결심합니다. 적의 눈을 피하기 위해 그는 가장 예상치 못한 방향, 즉 남동쪽에서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침묵 속의 학살

11월 24일 오후, 제국군 장군 요한 폰 베르트(Johann von Werth)는 2천 기의 기병을 이끌고 메링엔의 프랑스 전초기지를 공격했습니다. 기습은 완벽했습니다. 프랑스 보병연대 하나가 싸워보기도 전에 와해되고 말았습니다.

이어 바이에른 용기병(당시에는 승마 보병을 의미)들이 신속히 기동하여 투틀링겐 주변의 프랑스 거점들을 무력화했고, 덕분에 폰 메르시의 본대는 발각되지 않은 채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제국군은 곧바로 도시의 묘지를 지키던 프랑스 포병과 군수물자 경비대를 공격해 손쉽게 제압했습니다.

프랑스 편 독일 기병 연합군이 반격을 시도했지만 대패했습니다. 이어 카스파 폰 메르시(Caspar von Mercy, 원수의 형제) 휘하의 제국군 한 개 사단이 프랑스 편 독일 보병 연합군을 완전히 분쇄했습니다.

이윽고 재정비에 성공한 프랑스 기병대는 싸움을 걸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보병을 버린 채 도주해버린 것입니다. 불운한 프랑스 보병은 투틀링겐에서 궁지에 몰렸고, 결국 란차우와 함께 항복했습니다. 2천 명 규모의 프랑스 한 개 사단만이 더 오래 버텼으나, 일주일간의 포위 끝에 마침내 무릎을 꿇었습니다.

궤멸

프랑스-독일 연합군은 1만 1천 명(4천 명 사상, 7천 명 포로)을 잃고 모든 화포, 수송 수단, 짐까지 빼앗기며 궤멸했습니다. 놀라운 기동으로 이루어진 대재앙이었습니다. 란차우 외에도 제국군은 적군 장군 7명과 대령 9명을 포획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잠든 적을 무찌르다: 30년 전쟁의 전환점, 투틀링겐 기습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