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대왕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전쟁 기계로 불렸다.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승리를 거듭 거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이 신화는, 지금의 체코 도마쇼프(Domašov) 일대에서 벌어진 도마슈타들 전투에서 극적으로 무너지고 만다.
작동하지 않은 계획
1758년 5월, 프리드리히는 당시 오스트리아령이던 모라비아를 침공해 요충지 올로모우츠(Olomouc)를 포위했다. 그는 이 포위망을 풀기 위해 오스트리아군이 야전으로 나올 것이라 기대했고, 나온다면 완파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만약 오스트리아군이 구원에 나서지 않는다면 도시를 함락해 적지 한복판에 훌륭한 작전 기지를 확보하고, 그곳에서 빈까지 압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라비아 주둔 오스트리아군 사령관 다운 원수(Marshal von Daun)는 프로이센군의 질과 전력을 너무 잘 알았기에 정면으로 맞설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도시 수비대는 영웅적으로 저항하며 거의 한 달 동안 프로이센군을 막아냈다. 6월이 되자 도시는 함락 직전까지 몰렸다. 성벽은 두 곳에서 무너졌고 물자와 탄약도 바닥나기 시작했다. 문제는 공격하는 프로이센군도 마찬가지였다는 점이다. 그들 역시 보급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거대한 보급 차량대
군대에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프리드리히는 마차 4,000대와 소 2,500마리로 구성된 거대한 보급 차량대를 조직하고 강력한 호위 병력을 붙였다. 이 지역을 장악한 오스트리아 경보병의 위협으로부터 차량대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보급 차량대는 실레지아에 집결해 6월 말 모라비아에 도착했다. 일렬로 늘어선 차량대의 길이가 무려 45km에 달했기에 존재를 숨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호위 임무는 폰 모젤(von Mosel) 대령 휘하 약 11,000명(기병 1,340명)이 맡았고, 폰 치텐(von Zieten) 장군이 지휘하는 프로이센군 20,000명이 추가로 증원에 나섰다.
오스트리아군은 프로이센 보급대가 올로모우츠에 닿게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다운은 차량대 파괴 임무를 에른스트 기데온 폰 라우돈(Ernst Gideon von Laudon) 소장과 크로아티아 출신 요제프 폰 시스코비츠(Josef von Siskovics) 소장에게 맡겼다.
기습과 화망
라우돈은 먼저 6,000명(보병 4개 대대, 드래구언 연대 1개, 후사르 연대 1개, 경포병 및 경보병)을 이끌고 군트라모비체(Guntramovice) 마을에 배치된 뒤 시스코비츠를 기다렸다.
보급 차량대는 6월 28일 새벽 이 지역에 도착했다. 오스트리아군은 곧바로 발포를 개시했다. 프로이센 대대 하나가 반격에 나섰지만 집중 사격에 흩어져 버렸다. 프로이센군은 포병을 전개해 응사하며 오스트리아 진영을 향해 새로운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모든 공격은 막대한 손실을 내고 격퇴당했다.
전투는 이미 5시간째였지만 오스트리아군은 끝까지 버티고 있었다. 다만 조금씩 프로이센군의 수적 우위가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압박을 받은 라우돈은 프로이센군의 방해 없이 인근 모라비아 마을 베룬(Berun) 쪽으로 물러났다. 막대한 피해에도 프로이센군은 행군을 계속했지만 많은 시간을 잃은 상태였다.
보급 차량대가 다시 움직이는 동안 치텐이 병력과 함께 도착했다. 그러나 라우돈 역시 시스코비츠가 6,000명을 이끌고 합류하며 전력을 보강받았다.
재앙
6월 30일, 오스트리아군은 도마슈타들(Domstadl, 오늘날 체코 도마쇼프) 일대에 전개했다. 낮은 언덕과 숲으로 뒤덮인 이 지형은 두 장군이 준비한 매복 작전에 더없이 적합했다. 시스코비츠는 프로이센군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유일한 도로의 한쪽에 병력을 배치했다. 라우돈은 도로 반대편에서 2차로 개입할 계획이었다.
매복을 모른 채 프로이센군이 다가왔다. 병력 4,850명과 마차 250대로 이루어진 선두 부대는 그대로 통과를 허용받았다. 그러나 곧이어 프로이센 차량대의 주력이 모습을 드러내자 오스트리아군은 집중 사격을 퍼부었다. 기습을 당한 프로이센군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
이윽고 라우돈까지 가세하면서 거의 3:1에 가까운 수적 열세에 몰린 프로이센군은 압박을 더 이상 견디지 못했다. 7시간의 전투 끝에 프로이센군은 완전히 붕괴했다. 프로이센군의 손실은 3,500명을 넘겼던 반면 오스트리아군의 손실은 고작 600명에 불과했다.
물자와 탄약을 가득 실은 수천 대의 마차가 승자의 손에 넘어갔다. 여기에 프로이센 은화 200만 탈러, 즉 군 자금 전액과 말 2,200필, 수천 마리의 가축까지 모두 빼앗겼다. 파괴를 면한 것은 통과를 허용받은 선두의 마차 250대뿐이었으나, 그중 150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오스트리아 경보병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이 대승의 결과로 프리드리히는 올로모우츠 포위를 해제하고 모라비아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전술적 패배가 곧 전략적 패배로 이어진 것이다.
오스트리아군 연대 소속 정예 척탄병.
오스트리아군 경보병, 이른바 '크로아티아인(Croa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