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툴라 집단군의 창설과 하인리히의 임명
1945년 1월 소련군의 대공세로 초래된 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히틀러는 새로운 야전 집단군인 '비스툴라 집단군'을 창설합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집단군은 구데리안과의 격렬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하인리히 힘러의 지휘 아래 놓이게 됩니다.
결국 구데리안의 끈질긴 설득 끝에, 히틀러는 힘러에게서 비스툴라 집단군의 지휘권을 회수하고 새 사령관을 임명하는 데 동의합니다. 흥미롭게도 후임으로 선정된 인물은 뚜렷한 전공에도 불구하고 독실한 종교적 신앙심 때문에 히틀러의 신뢰를 얻지 못했던 고타하르트 하인리히(Gotthard Heinrici) 장군이었습니다.
'왜소한' 대령
1945년 4월 6일, 히틀러의 유명한 벙커로 소집된 하인리히는 현재 직면한 모든 문제점을 상세히 보고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히틀러가 '요새'로 규정했던 오더 강변의 프랑크푸르트를 포기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당시 프랑크푸르트 방어 임무는 베테랑인 에른스트 비엘러(Ernst Bieler) 대령이 맡고 있었습니다. 42세의 이 대령은 키가 작고 머리숱이 다소 빠졌으며 안경을 쓴 인물이었습니다. 어떻게 봐도 '아리아 초인'이라는 나치의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습니다.
1903년 울름에서 태어난 비엘러는 1923년 군에 입대하여 1939년까지 역사 깊은 제13보병연대에서 복무했습니다. 1940년에는 프랑스 침공에 참전했고, 이어진 소련 침공 작전에서도 우만, 키예프, 세바스토폴, 레닌그라드 전투를 모두 경험한 베테랑이었습니다.
1944년에는 육군대학을 수료하고 대령으로 진급하여 제385보병연대의 지휘를 맡았으며, 1945년 초 오더 강변 프랑크푸르트 '요새'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하인리히의 프랑크푸르트 포기 건의를 들은 히틀러는 잠시 고민하는 듯했으나, 곧 분노를 폭발시키며 철수를 거부했습니다. 하인리히가 계속 주장을 밀고 붙이자 히틀러는 비엘러가 '그나이제나우'냐며 조롱 섞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는 1806~1807년 프랑스군으로부터 콜베르크(Kolberg) 마을을 사수한 프로이센의 영웅 장군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결국 히틀러는 비엘러를 직접 만나겠다고 요청했습니다.
장군의 강경한 개입
예상대로 히틀러는 비엘러를 피상적으로만 평가하고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으며, 그의 교체를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눈치'를 살피며 움직이던 일반적인 장군들과는 다른 하인리히를 계산에 넣지 못했습니다.
비엘러의 교체 소식을 접한 하인리히는 즉시 육군최고사령부 참모총장이자 히틀러의 심복인 크렙스(Krebs) 대장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크렙스는 한마디 말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크렙스, 비엘러 대령은 지금 내 집무실에 있다. 내 말을 잘 들어!"라고 외쳤습니다.
"비엘러가 다시 프랑크푸르트의 지휘를 맡을 것입니다. 부르크도르프(또 다른 히틀러의 심복 장군)에게 이미 말했습니다. 이제 당신에게 하는 겁니다. '그 자리에 다른 장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거부한다'고, 그는 한 단어 한 단어를 강조하며 말했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나?" 그리고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있다. 비엘러의 철십자장은 어디 있나? 그는 몇 달째 서훈 수여를 기다리고 있다. 지금 받아야 한다. 알겠나?" 그는 얼굴이 붉어진 크렙스에게 소리쳤습니다.
"잘 들어, 크렙스. 비엘러가 철십자장을 받지 못한다면, 비엘러가 다시 프랑크푸르트 지휘를 맡지 못한다면, 나 역시 사직하겠다. 알겠나? 오늘 중으로 답을 줘." 그렇게 외치고는 크렙스의 전화를 끊어버렸습니다.
4월 7일 오후, "비엘러가 프랑크푸르트 지휘관으로 복직되었으며, 철십자장이 그에게 발송될 것"이라는 통보가 도착했습니다. 주목할 점은 비엘러와 그의 병력들이 소련군의 맹렬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무려 7일간 프랑크푸르트를 사수했다는 사실입니다. 비엘러는 전쟁의 마지막 날 소장으로 진급했으며, 1997년 자택에서 평화롭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하인리히 장군(왼쪽).
1945년 4월 16일, 오더 강 전선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