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잊혀진 아랍 현대사의 한 페이지
짧지만 격렬했던 이집트-리비아 전쟁은 아랍 현대사에서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입니다. 이 전쟁은 1973년 욤키푸르 전쟁에서 크게 패배한 뒤 이집트의 지도자 안와르 사다트가 이스라엘에 대해 취한 태도와 직접적으로 얽혀 있습니다.
'아랍 권익'의 가장 광신적인 수호자로 자처하던 무아마르 카다피는 이집트, 시리아, 리비아로 구성된 아랍 공화국 연방이 붕괴한 후, 사다트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비열한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카다피의 공식적인 목표는 이스라엘의 소멸이었지만, 1973년부터 그는 이스라엘과 맞서기를 거부하는 겁쟁이라며 사다트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관계의 완전한 파열
그러던 중 사다트는 카다피가 이스라엘 관광객을 태운 크루즈 선박을 지중해에서 침몰시킬 계획이었다는 사실을 폭로했습니다. 이 폭로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깨져버렸습니다. 소련의 대대적인 지원으로 군사력이 크게 강화된 카다피는, 훗날 에르도안이 그랬던 것처럼 이집트 내 무슬림 형제단을 지원하는 등 사다트 정권을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맞선 사다는 리비아 내외부의 반카다피 세력을 적극 지원했습니다. 심지어 미국에 이스라엘을 설득해 이집트를 공격하지 않도록 요청할 정도였습니다. 이는 이집트가 온 힘을 다해 카다피와 싸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포석이었습니다.
갈등 고조: 국경으로 향하는 병력
1976년 초, 카다피는 이집트와 접한 국경에 병력을 증강 배치했습니다. 총 병력 3만 명에 달하는 두 개의 기계화 보병 사단을 국경으로 파견했고, 국경 근처 마르사마트루 기지에는 전투기 80대를 배치했습니다. 같은 해 7월에는 벵가지에 있는 이집트 영사관마저 폐쇄했습니다.
반면 사다는 성급하게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조용히 국경 지역에 병력을 집결시키기 시작했습니다. 1977년 5월, 소련은 카다피에게 "이집트가 공격 준비를 마쳤다"고 경고했지만, 카다피는 경고를 무시하고 나른한 태도로 일관하며 오히려 국경에서 병력 일부를 철수시켰습니다. 그 사이 이집트군은 미라주 5, Su-20, Su-7 전투기를 이미 국경 인근으로 이동시켜 둔 상태였습니다.
1977년 7월 12일, 16일, 19일에는 국경에서 피비린내 나는 충돌과 교전이 벌어졌습니다. 카이로 당국은 이 과정에서 이집트 병사 9명이 사망했다고 인정했습니다. 동시에 카다피는 사다트의 대(對)이스라엘 정책에 항의하기 위해 카이로로 행진할 아랍 광신도들의 행진을 조직했습니다. 하지만 이집트군은 국경에서 이른바 '자발적 시위대'의 진입을 저지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카다피는 마침내 침공 명령을 내립니다.
전쟁 발발: 압도적인 전력 차
이집트군은 돌격대 대대로 증강된 두 개 사단을 국경에 배치했고, 또 하나의 사단이 즉시 개입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총 병력은 약 4만 명에 달했습니다. 반면 방심하고 있던 카다피가 국경에 배치한 병력은 고작 3개 여단, 총 5천 명에 불과했습니다.
더욱이 리비아의 육군과 공군은 어떤 기준으로 봐도 처참한 상태였습니다. 많은 전차와 항공기들이 유지보수에 '세월'이 걸릴 정도로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공군이 미라주와 MiG-23 전투기 100여 대를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카다피가 거느린 조종사는 총 150명도 되지 않았고, 그중 상당수는 이름뿐인 조종사였습니다. 그럼에도 이집트를 공격하라고 명령한 것은 바로 카다피 자신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제정신이 아니라는 평가를 받을 만한 결정이었습니다.
7월 21일, 국경을 넘은 리비아군
리비아 제9기갑군단은 7월 21일 드디어 국경을 넘어 이집트 영토로 진입했습니다. 하지만 이집트군은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집트군은 즉각 반격에 나서 리비아군을 패주시켰고, 리비아군은 병력과 장비의 50% 이상을 잃는 참패를 당했습니다.
리비아 공군이 즉시 개입해 샤르움(Shalloum)을 폭격했지만 성과는 미미했습니다. 오히려 이집트군은 리비아 전투기 2대를 격추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집트군의 반격은 더욱 강력했습니다. 미라주 4대, MiG-21 4대, Su-7 8대로 구성된 편대가 적의 공군기지 2곳을 초토화시켰고, 지상에서 리비아 항공기 7대를 파괴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집트군은 Su-7 1대를 잃었습니다. 이집트군은 또한 레이더 기지 공격에도 성공했습니다. 동시에 이집트군의 두 개 기계화 사단이 리비아 영토로 진격해 24km까지 깊숙이 밀고 들어가며 적을 패주시켰습니다.
리비아군은 여기에 장갑차량 60대를 추가로 상실했습니다. 다음 날 리비아 공군이 다시 전장 상공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뚜렷한 성과 없이 전투기 2대를 추가로 잃었습니다. 이집트군도 보복 공습에 나섰지만 큰 성과는 없었습니다. 한편 수천 명의 리비아 민간인들은 공포에 질려 서쪽으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다행히 이집트군은 민간인을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특수부대의 기습과 카다피의 굴욕
이집트 특수부대는 이 기간 동안 매우 성공적인 심층 기습 작전을 감행해 적의 야영지와 레이더 기지들을 무력화했습니다. 7월 23일, 카다피의 공군은 다시 한번 공격을 시도했지만 뚜렷한 성과 없이 전투기 4대를 잃었습니다. 이집트군은 특수부대의 새로운 기습으로 응수하며 적의 군사 기반 시설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전쟁의 결과와 그 후
이 전쟁에서 리비아는 최소 전차 30대, 기타 장갑차량 40대 이상, 병력 400명 이상, 그리고 최소 10대(일부 자료에서는 20대)의 항공기를 잃었습니다. 반면 이집트의 손실은 항공기 4대와 병력 100명에 그쳤습니다.
카다피에게 이것은 굴욕 그 자체였습니다. 결국 야세르 아라파트의 중재로 휴전이 성립되었고, 8월 24일에는 포로 교환이 이루어졌습니다. 한편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를 이집트에 반환하는 내용의 공식 평화협정을 체결했습니다.
하지만 이집트와 리비아 간의 긴장은 계속되었고, 일부 분석가들은 카다피가 사다트 암살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주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