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2년 당시 유럽의 초강대국이었던 프랑스가 작은 나라 네덜란드를 상대로 벌인 군사 원정으로 시작된 전쟁은, 1675년에 이르러 완전히 양상이 바뀌었다. 제한적인 규모의 분쟁으로 출발했던 '네덜란드 전쟁'은 합스부르크 제국과 독일 민족 신성로마제국까지 휘말리는 범유럽 전쟁으로 확대된 것이다.
튀렌 원수의 전사, 전황의 급변
7월 27일, 뛰어난 지휘관 몬테쿠콜리(Montecuccoli) 원수가 이끄는 제국군은 작스바흐에서 프랑스군과 조우했다. 그러나 단 한 발의 포탄이 전투의 향방을 결정지었다. 포탄은 프랑스군 총사령관 튀렌(Turenne) 대원수를 산화조각으로 만들었고, 지휘관을 잃은 프랑스군은 어쩔 수 없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 틈을 타 로렌 공작 샤를 4세(Charles IV)가 이끄는 또 다른 제국군은 1673년 프랑스가 점령했던 트리어 시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트리어 구원에 나선 크레키 원수
당시 트리어에는 프랑스 대대 7개가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는 이 도시를 반드시 지키고자 했고, 프랑수아 드 크레키(François de Créquy) 원수에게 포위망을 '돌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크레키가 이끈 병력은 보병 12개 대대, 기병 36개 연대, 대포 11문, 총 1만 5천 명에 달했다.
크레키의 접근 소식을 접한 제국군은 이를 막기 위해 서둘러 진군했고, 포위 중인 트리어 앞에는 대대 9개와 기병 4개 중대만 남겨두었다.
양군의 전력 비교
크레키를 맞아 나선 병력은 보병 11개 대대, 기병 42개 중대, 대포 14문으로 구성되었다. 샤를 공작 군대의 주력은 뤼네부르크와 오스나브뤼크 출신 병사들이었고, 나머지는 로렌, 뮌스터, 트리어, 오스트리아 출신이었다. 제국군은 3개 방진을 이루어 배치되었다.
오스트리아 장군 폰 그라나(von Grana)가 지휘하는 우익은 로렌 기병 12개 중대와 용기병 4개 중대(오스트리아 2개, 로렌 2개)로 이루어졌다. 중앙은 모든 보병과 포병이 담당했고, 좌익은 기병 24개 중대(오스나브뤼크·뤼네부르크 출신 18개, 오스트리아 출신 6개)가 맡았다. 제국군의 총 병력은 1만 6천 명이었다.
자애 강 도하와 기습
제국군은 8월 10일 저녁, 모젤 강의 지류인 자애(Saar) 강에 놓인 콘처브뤼케(Konzer Brücke, 콘츠 다리)에 도착해 그곳을 지키던 프랑스 경비대를 손쉽게 제압하고 다리를 장악했다.
다음 날 아침 제국군은 세 곳에서 강을 건넜다. 프랑스군은 기습을 당해 보급품을 실은 배 두 척마저 적 기병에게 빼앗길 정도였다. 오전 11시경 제국군의 공격이 개시되었다. 그러나 프랑스군도 결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그들은 훌륭하게 저항하며 적의 공세를 막아냈다.
그라나의 결단, 전세를 뒤집다
크레키는 심지어 역공까지 감행해 상대 익(翼) 하나를 거의 궤멸시킬 뻔했다. 위기를 구한 이는 이탈리아계 오스트리아 장군 폰 그라나였다. 그는 기병 2,200명, 용기병 600명, 보병 4,500명, 대포 3문을 규합해 프랑스군에게 돌격했고, 프랑스군 좌익을 후퇴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어 제국군이 타번(Tavern) 고지를 점령하면서 남은 프랑스군은 측면을 완전히 노출당했다.
붕괴와 참혹한 추격전
크레키는 판세를 만회하려 애썼지만, 곧 그의 부대는 와해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날 프랑스군은 2,000명이 전사하고 1,600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수천 명이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다. 대포 11문, 군기와 깃발 80개, 보급품과 탄약을 실은 마차 200대가 모두 승자의 손에 넘어갔다. 제국군의 피해는 전사 1,000명이었다.
제국군은 패주하는 적을 50km에 걸쳐 추격했다. 기록에 따르면 제국군은 자비를 베풀지 않았고, 궤멸당한 프랑스 대대도 있었다고 한다. 크레키는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져 로렌 기병의 군복으로 갈아입고, 선두에 선 호위대와 함께 트리어까지 달려갔다.
트리어 함락
제국군은 다시 포위전을 재개했다. 프랑스 수비군은 끝까지 저항했지만 처참한 피해를 입었다(6,000명 중 1,500명만 생존). 크레키가 제국군의 항복 권고를 거부하자, 그의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항복해 버렸다. 이 포위전에서 제국군의 손실은 겨우 500명이었다.
트리어는 다시 독일의 도시가 되었고, 통치권은 주교 카를 카스파 폰 데어 라이엔(Karl Kaspar von der Leyen)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크레키는 저항을 포기하지 않고 소수의 병력과 함께 시내 성당에 웅거해 농성했다. 결국 프랑스군의 저항은 무너졌고, 크레키는 포로로 잡혔다.
역사의 전환점이 된 전투
이 전투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럽사의 전환점이 되었다. '태양왕'이라 불린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군대가 겪은 첫 번째 대규모 패배로, 프랑스군이 무적이 아니음을 세상에 보여준 사건이었다. 물론 1704년 블렌하임 전투처럼 결정적인 국면을 바꾼 충돌은 아니었지만, 당시 전황을 뒤집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전투였음은 분명하다.


자애 강을 건너는 제국군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