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기근을 무기로 삼아 수백만 소련인을 죽인 스탈린의 '홀로도모르'

기근을 무기로 삼아 수백만 소련인을 죽인 스탈린의  홀로도모르

우크라이나에서는 지금도 이 비극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시 우크라이나 주민들이 독일군에게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고, 오늘날까지 반러시아 감정이 강하게 남아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홀로도모르'. 한 단어 속에 모든 공포가 담겨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어로 이 단어는 "기근에 의한 살인"이라는 표현에서 변형된 것으로, 곧 기근을 무기로 삼은 집단살해를 의미합니다. 실제로 2006년부터 현재까지 우크라이나를 비롯해 15개국이 이를 집단학살(제노사이드)로 공식 인정했습니다.

희생자 수, 추정조차 어려운 참상

희생자 수는 정확한 통계가 남아 있지 않아 추정만 가능합니다. 2003년 유엔 결의안은 희생자를 700만~1,000만 명으로 추산했고, 더 보수적인 추산으로도 33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스탈린이 직접 명령한 1937년 인구 조사에서는 소련 인구가 약 800만 명 가까이 감소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스탈린은 자신만의 '독재자다운' 방식으로 대응했습니다. 인구 감소 사실을 밝힌 조사 책임자들을 전원 처형하고, 자신과 측근들이 제공한 데이터를 담은 새 인구 조사를 실시했던 것입니다.

우크라이나, 몰도바 등 옛 소련 공화국에서 벌어진 기근은 스탈린의 공업화와 농업 집단화 계획과 직결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우크라이나에서는 소위 '부유농'으로 불린 쿨라크 숙청 작업과 맞물려 진행되었습니다.

"자유로운 농민"의 완전한 제거가 목표

스탈린의 진짜 목표는 집단농장에 소속되지 않은 모든 '자유로운' 경작자의 소멸이었습니다. 스탈린 체제는 농민들을 '인민의 적'으로 규정하고, 도시에서까지 나타난 식량 부족을 정당화하기 위해 대대적인 선전 캠페인을 벌여 여론을 조작했습니다.

기근은 1931년부터 시작되었지만, 그 원인은 크렘린의 정치적 결정에 있었습니다. 집단농장은 충분한 수확량을 내지 못했는데도 곡물 재배는 사탕무와 면화 같은 수출용·공업용 작물로 대체되었고, 식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소련 정부는 오히려 곡물 수출을 늘렸습니다.

우크라이나의 기근은 인위적인 것이었으며, 소련 체제에 동화되지 않은 우크라이나인들에게 고통을 가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모스크바의 명령에 따라 오직 우크라이나에만 적용된 특별 조치들이 이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수많은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굴라그로 끌려갔고, 기근 지대를 떠나려던 사람들은 처형당했습니다. 서부 우크라이나의 많은 주민들은 폴란드로 대거 월경했습니다.

죽음과 식인(食人)

첫 번째 문제 징후는 이미 1931년에 보고되었습니다. 도시에서는 1933년 겨울부터 식량 배급이 시작되었습니다. 배급권을 가진 사람들은 밤마다 상점 앞에 몰려들어 때로는 며칠씩 빵 한 덩이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시골의 집단농장은 씨앗마저 부족했습니다. 씨앗마저 소비용이 아니면 수출용으로 납부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강제로 집단농장에 편입된 농민들은 자신들이 기른 가축마저 모두 내놓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소련 당국은 우크라이나 현지 관리들이 1932년 봄부터 거듭 종자곡을 요청했음에도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상황은 급속히 통제 불능으로 치달았습니다. 사람들은 곳곳에서 죽어갔지만 당국은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습니다. 일부는 생존을 위해 시신을 잡아먹는 극단적 선택을 했고, 발각될 경우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시 한 의사는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아직 식인이 되지는 않았지만, 피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선한 사람이 먼저 죽습니다. 훔치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죽습니다. 매춘을 하지 않는 사람이 죽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음식을 나눠주는 사람이 죽습니다. 시신을 먹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죽습니다. 친척을 죽이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죽습니다. 식인을 부인하는 부모는 자식보다 먼저 죽습니다."

체제가 내놓은 대응은 한마디 성명뿐이었습니다. "자기 자식을 먹는 것은 야만 행위다." 식인 혐의로 최소 2,500건 이상의 유죄 판결이 선고되었습니다.

당시 스탈린의 측근이었던 라자리 카가노비치는 굶주린 사람들을 게으름뱅이라 비난하며, 기근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아버지 스탈린'을 향한 선전성 허위 비방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스탈린 본인 역시 기근은 자신에 대한 음모이며, 농민들이 기근을 자신에 대한 무기로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개인 전용 열차를 타고 흑해 휴양지 소치로 향하는 여행 중에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열차의 주방에서는 최고급 요리가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결국 스탈린은 기근의 원인을 '배반', 즉 '제국주의' 폴란드와의 협력 탓으로 돌렸습니다.

기근을 무기로 삼아 수백만 소련인을 죽인 스탈린의  홀로도모르

소련 간부가 농민들로부터 밀을 징발해가는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