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패배했는데 '대승' 보고…마드리드 전체를 속인 스페인 장군의 사기극

패배했는데  대승  보고…마드리드 전체를 속인 스페인 장군의 사기극

1743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3년째에 접어들었다. 전화는 유럽 끝에서 끝까지 번졌을 뿐만 아니라 아메리카와 아시아까지 뻗쳤고, 많은 이들이 이 전쟁을 '제1차 세계대전'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라고 평했다.

이탈리아 역시 이 전쟁의 중요한 전선 중 하나였다. 스페인군, 나폴리군,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군과 피에몬테 왕국 연합군과 맞섰다. 발롱 출신 장군 콩트 드 가주(Comte de Gages)가 지휘하는 스페인·나폴리 혼성군은 모데나 북쪽 파나로 강까지 진격해 있었다.

이 군대는 보병 11,400명, 기병 2,600명, 대포 12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드 가주는 마드리드로부터 즉각적인 전과를 요구받으며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었다. 그가 지닌 병력이 인상적이지는 않았지만, 마주할 적 역시 결코 대단한 규모는 아니었다. 다만 한 가지 차이점이 있었다. 적군을 지휘하는 자가 극도로 냉철한 인물이라는 점이었다.

압박 속에서 스페인 장군은 적국인 모데나 공국으로 진격하여, 원수 폰 트라운(von Traun)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피에몬테 연합군과의 결정적 교전을 추구했다. 트라운 군은 보병 9,000명, 기병 3,000명, 대포 25문을 보유하고 있었다.

양측의 전력

두 소규모 적대 세력은 모데나 남동쪽 20km 지점의 작은 마을 캄포 산토(Campo Santo)에서 마주했다. 드 가주는 부대를 다음과 같이 배치했다.

최우익에는 정예 기병 연대인 카라비니에리와 바실리사(왕비) 중기병 연대가 각 3개 중대씩 배치되었다. 그 왼쪽에는 왕립 스페인 근위 여단(6개 대대)이 자리했다. 중앙에는 카스티야, 플랑드르, 롬바르디아 3개 보병 연대가 각 2개 대대씩 정렬했다. 그 왼쪽에는 발롱 근위 연대(6개 대대)가 위치했고, 옆에는 사구다 용기병 연대 3개 중대가 배치되었다.

이들 후방 제2열에는 우에서 좌로 바실리사 용기병 연대(3개 중대), 왕립·과달라하라·크라운 3개 보병 연대, 유명한 '야생 거위(Wild Geese)'라 불린 아일랜드 용병 2개 연대(4개 대대)로 구성된 아일랜드 여단, 파르마 여단 4개 대대, 후사르 부대, 나폴리 왕국의 이탈리아 및 '알바니아' 부대가 늘어섰다.

반면 폰 트라운은 직속 후사르 사단과 함께 슐렌베르크 여단(5개 대대, 경포 6문), 팔라비치니 여단(명문 도이치마이스터 연대 2개 대대, 폰 트라운 연대 3개 대대, 경포 2문), 아스프레몬트 여단(피에몬테 보병 4개 대대, 대포 10문), 피어스베르크 여단(오스트리아 중기병 6개 연대, 피에몬테 중기병 2개 연대, 후사르 300명)을 배치했다.

제2열에는 오스트리아 보병 6개 대대와 피에몬테 보병 4개 대대, 용기병과 기병 6개 중대, 슬라브 산악경비대 몇 개 중대와 함께 대포 4문을 배치했다.

전투

1743년 2월 8일 아침, 드 가주는 보병을 중앙에, 기병을 양익에 두는 정통적인 대형으로 부대를 배치했다. 트라운 역시 같은 방식으로 부대를 정렬했으나, 적과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고 좌측으로 치우치게 하여 오스트리아군 중앙이 스페인군 우익과 맞서도록 했다.

이를 통해 트라운은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국부적인 수적 우위를 확보하여, 최정예 부대가 배치된 적 우익을 격파하려 한 것이다. 물론 동시에 스페인군 중앙과 좌익이 노출된 자신의 측면을 압도할 위험도 있었다. 그러나 트라운은 그곳의 병력이 자신이 적 우익을 분쇄할 때까지 버틸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마치 알렉산더 대왕이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구사한 전술과 같은 것이었다.

드 가주가 먼저 공격을 개시했고, 처음에는 성공하는 듯 보였다. 스페인 기병은 일시적으로 적을 압도하며 피에몬테 장군 아스프레몬트에게 부상까지 입혔다. 그러나 트라운은 흔들리지 않았다. 좌익을 안정시킨 후, 그는 정예 보병을 선봉에 세워 반격에 나섰다. 동시에 기병을 재정비하여 스페인 기병에게 역공을 가해 밀어냈다.

점차 스페인 우익은 무질서하게 무너졌고, 드 가주는 후퇴를 명령할 수밖에 없었다. 과달라하라 연대는 전원 항복했다. 전투는 밤이 되며 중단되었다. 패배한 스페인군은 파나로 강을 건너 볼로냐 방면으로 후퇴했다. 패자 스페인군의 총 손실은 약 4,000명(전사 1,755명)에 달했다. 승자의 피해는 1,500명 미만(전사 397명)이었다. 승리를 이끈 트라운은 전투의 한복판에서 적의 포격으로 말 두 필을 잃기도 했다.

'승자'

패배와 후퇴에도 불구하고, 드 가주는 주저 없이 자신이 거둔 '위대한 승리'를 마드리드에 보고했다. 이 '승리'는 스페인 전역에서 축하받았고, 드 가주는 왕실로부터 포상까지 받았다.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말이다. 그러나 또다시 스페인 육군과 왕권의 체면을 위해, 드 가주는 마땅히 받아야 할 처벌을 받지 않았다.

패배했는데  대승  보고…마드리드 전체를 속인 스페인 장군의 사기극

오스트리아 소총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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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 트라운 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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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포 산토 전투 당시 양측의 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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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보병. 미니어처로 재현한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