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크루파 공성전: 단 28명의 수비수가 12,000명 터키 대군에 맞선 20일간의 결사 저항

크루파 공성전: 단 28명의 수비수가 12,000명 터키 대군에 맞선 20일간의 결사 저항

크루파는 오늘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하지만 1565년 당시에는 상황이 달랐다. 이곳은 합스부르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을 가르는 국경 요새였고, 오스만 제국은 여전히 술레이만 대제의 통치 아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위대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소심하고 신의 없는 모습이었다…

깨진 휴전 협정

1564년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페르디난트 폰 합스부르크가 세상을 떠나자, '정직한' 술레이만은 불과 2년 전인 1562년에 막 체결한 휴전 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기로 결심한다.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자신이 후원하던 트란실바니아 공작 존 자폴리아와, 페르디난트의 아들이자 차기 황제가 될 막시밀리안 폰 합스부르크 사이의 분쟁이었다.

13세기 요새, 크루파

크루파에는 13세기에 지어진 작은 성이 있었다. 우나(Una) 강 근처의 가파른 바위 절벽 위에 세워진 이 성의 기슭에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마을이 자리하고 있었다. 크루파는 1509년, 그리고 1522~23년에도 오스만 제국의 공격 표적이 된 적이 있었지만, 두 번 모두 터키군은 굴욕적인 후퇴를 감행해야만 했다.

단 28명 vs 12,000명

그러나 1565년, 오스만 군대는 다시 나타났다. 휴전 협정이 아직 유효한 상태였기에 합스부르크 측은 국경 요새에 병력을 제대로 배치하지 못했다. 그 결과 성을 지키는 병력은 마티아스 바키츠(Matias Bakits) 휘하의 단 28명뿐이었다. 이 고작 스물여덟 명의 용사를 상대로, 보스니아의 무스타파 파샤 소콜로비치가 12,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 왔다.

예상을 깬 20일간의 저항

터키군은 크루파에 도착해 6월 3일 성을 포위하고 공성전을 개시했다. 그러나 모든 이의 예상을 깨고, 수비대는 첫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어디에서도 원군을 기대할 수 없음을 잘 알던 수비수들에게 승패는 처음부터 의미가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최후를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영웅적'이라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필사적으로 싸워 나갔다.

시간이 흘렀다. 터키 파샤는 분노에 들끓었지만 성은 좀처럼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나 용사들의 비극적인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20일간의 저항 끝에 마지막까지 일어서 있던 수비수는 부상을 입은 단 8명뿐이었다.

레오니다스의 300인처럼, 죽음을 향한 마지막 돌진

남은 8명은 스스로 고통에 종지부를 찍기로 결심했다. 자결이 아니라, 단 8명의 몸으로 12,000명의 적진에 돌격하는 방식이었다! 1565년 6월 23일, 바키츠가 이끄는 이 8명의 전사들은 레오니다스 왕의 300인처럼 죽음을 향한 마지막 돌진을 감행했고, 그렇게 불멸의 이름을 역사에 새겼다.

그중 6명은 신앙 없는 적들의 무리와 격렬하게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 나머지 2명은 강에 몸을 던져 탈출에 성공했다.

크루파 공성전: 단 28명의 수비수가 12,000명 터키 대군에 맞선 20일간의 결사 저항

시대의 판화에 담긴 크루파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