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로운 소도시에 닥친 전쟁의 그림자
가르델레겐(Gardelegen)은 현재 독일 동부 작센안할트주에 위치한 작은 도시다. 한때 조용하고 평화롭던 이곳에 1945년 4월 둘째 주, 전쟁의 참화가 닿았다. 연합군의 압박이 거세지면서 독일군은 후퇴를 거듭하는 와중에 자신들이 저질러온 끔찍한 범죄의 흔적까지 지우려 했다.
악명 높은 부헨발트 수용소의 분소였던 미텔바우도라(Mittelbau-Dora) 강제수용소와 하노버스퇴켄(Hannover-Stöcken) 수용소 역시 이 과정에서 철수 명령을 받았다. 친위대(SS) 감시병들의 호위 아래 두 수용소의 노예 노동자 신분 포로 1,016명이 서쪽으로 이송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폴란드인이었지만, 소련인과 일부 서유럽 출신도 함께 있었다.
창고에 불을 지른 손들
1945년 4월 13일, 베를린 전투 개시 사흘 전, 포로와 호위 병력이 가르델레겐에 도착했을 때 SS는 포로들을 '처분'하기로 결심한다. 인원이 부족했던 그들은 지역 국민돌격대(Volkssturm) 민병대, 히틀러청소년단 소년들, 일반 주민들, 심지어 소방관들까지 동원해 도움을 청했다. 포로들을 한 창고로 몰아 넣은 뒤 문을 못으로 박아 봉쇄하고, 건물 전체에 휘발유를 뿌린 채 불을 질렀던 것이다!
비운의 포로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하지만 불타는 창고에서 탈출하려던 이들은 가차 없이 총살당했다.
가해자들은 다음 날 범죄의 흔적마저 덮으려 했다. 시신 잔해와 창고를 태워 없애기 위해 살인자들은 4월 14일 현장에 모여 유해를 파괴하고 증거를 제거하는 작업에 나섰다.
미군의 도착, 그리고 민간인들의 '변신'
그러나 운은 다르게 흘러갔다. 바로 그날, 미 제102보병사단 예하 제405보병연대 2대대 F중대가 도시에 입성한 것이다. 독일인들은 계획을 접었고, 마법처럼 짐승에서 평화로운 시민으로, 순진한 아이로, 평범한 소방관으로 변신했다.
하지만 미군은 지역 조사를 진행하던 중 아직도 연기를 내뿜는 창고 폐허에 도달했고, 범죄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마주하게 된다. 조사 과정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생존자 11명(폴란드인 7명, 프랑스인 1명, 소련인 3명)도 발견되었다.
책임은 어디에?
4월 21일, 미군은 독일 주민들에게 피해자들의 시신을 직접 수습하고 정식으로 매장하도록 강제했다. 총 1,016구의 시신이 매장되었으며, 미군은 학살된 이들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다. 동시에 책임 소재를 규명하기 위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결국 법의 심판을 받은 독일인은 단 한 명뿐이었다. SS 중위 에르하르트 브라우니(Erhard Brauny)는 1947년 재판에 회부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1950년 옥사했다. 히틀러의 범죄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행동했던, 이름 없는 살인자 무리인 독일 민간인들은 끝내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