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 및 연합군 보병이 프랑스 기병의 대규모 돌격을 손쉽게 격퇴하면서, 나폴레옹 시대의 보병 방진(方形陣)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이 방진 진형은 사실 훨씬 오래된 것으로, 17~18세기에도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물론 르네상스 시대나 고대부터 방진이 다양하게 활용되었다는 점은 별개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나폴레옹 시대의 방진 역시 만능은 아니었고, 적 기병에게 돌파당한 사례도 실제로 존재합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스페인 살라망카 남쪽에서 벌어진 가르시아 에르난데스(García Hernández) 전투입니다.
살라망카의 패배와 후위 추격전
1812년 7월 22일, 웰링턴 공작의 연합군(영국·독일·포르투갈·스페인)은 마르몽(Marmont) 원수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을 격파했습니다. 13,000명 이상의 손실을 입은 프랑스군은 비참한 상태로 후퇴를 시작했습니다.
막시밀리앙 푸이(Maximilien Foy) 소장이 지휘하는 약 4,000명 규모의 여단이 패주하는 프랑스군의 후위를 맡았습니다. 이 여단은 제6경보병연대, 제39선열보병연대, 제69선열보병연대, 제76선열보병연대 각 2개 대대씩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쿠르투아(Courtois) 준장의 기병사단, 즉 지칠대로 지친 경기병 19개 스쿼드론이 증원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웰링턴은 적이 아무 탈 없이 후퇴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왕립 독일 군단(King's German Legion)의 에버하르트 오토 게오르크 폰 보크(Eberhard Otto Georg von Bock) 소장에게 기병여단을 이끌고 프랑스군을 추격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보크 여단은 왕립 독일 군단 소속 제1·제2중기병연대 2개 연대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두 연대를 합쳐도 겨우 770명에 불과했습니다.
얼마 후 웰링턴은 조지 앤슨(George Anson) 소장의 영국 경기병여단(제11·12·16경용기병연대, 약 1,000명)으로 보크를 증원하기로 결정합니다. 보크는 최대 속도로 진군했고, 다음 날인 7월 23일, 살라망카에서 30km 떨어진 작은 마을 가르시아 에르난데스 인근에서 프랑스군 후위를 발견했습니다.
패주한 프랑스 기병, 방진을 이룬 보병
연합군 기병이 나타나자 쿠르투아와 그의 기병들은 잠시 앤슨의 영국군과 대치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부끄럽게도 도주해 버렸습니다. 동료 보병인 푸이의 부대를 버린 것입니다. 적 기병을 목격한 푸이는 즉시 대대별로 방진을 형성하라고 명령했고, 이렇게 하여 인근의 황량한 언덕 위에 프랑스군 방진 8개가 세워졌습니다.
부상당한 말 한 필이 만든 결정적 틈새
프랑스군의 방진을 본 보크는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즉시 독일 기병들을 이끌고 가장 가까운 적 방진, 곧 제6경보병연대 대대의 방진으로 돌진했습니다. 프랑스군은 적을 향해 조준 사격을 하지 않고, 독일군이 아주 가까이 다가왔을 때 일제히 발사하기 위해 사격을 참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치명적인 실수였습니다.
마침내 일제사격이 터졌을 때 프랑스군은 적 기병과 말 몇 필을 쓰러뜨렸지만, 독일군은 이미 너무나 가까이 다가와 있었습니다. 부상당한 한 필의 말이 전사한 기수를 등에 업은 채 프랑스 보병 방진 안으로 곤두박질쳤습니다.
중상을 입은 이 말은 최소 여섯 명의 프랑스 병사를 깔아뭉갰고, 이렇게 방진에 구멍이 생겼습니다. 보크와 그의 부하들이 놓치지 않고 파고든 틈새였습니다. 파도처럼 밀려든 독일 기병들은 곧은 긴 검을 휘두르며 프랑스군에게 돌진해 순식간에 많은 병사를 베어 쓰러뜨렸습니다. 글라이젠 대위가 자신의 스쿼드론을 이끌고 가장 먼저 방진 안으로 뛰어들었고, 프랑스군 방진은 붕괴하여 더 많은 병사들이 항복했습니다. 나머지는 말 그대로 짓밟혔습니다. 그러나 최악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접촉 전에 스스로 무너진 두 번째 방진
첫 승리 직후 독일군은 두 번째 프랑스 방진으로 돌진했습니다. 이번에는 부상당한 말 같은 우연조차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군의 사기는 너무나 붕괴되어 있어서, 적과 접촉하기도 전에 방진이 스스로 와해되고 말았습니다. 독일 기병들이 할 일은 당황해 허둥대며 무방비 상태가 된 보병들을 토끼 사냥하듯 추격해 포로로 잡거나 죽이는 것뿐이었습니다.
세 번째 방진 역시 공황으로 거의 무너질 뻔했지만, 장교들의 통제 개입 덕분에 간신히 버텼습니다. 물론 전사자·부상자·포로라는 대가를 치렀지만요. 많은 프랑스 병사들이 공포에 질려 도주했고, 프랑스 기병이 이미 달아난 뒤라 상대가 없게 된 앤슨의 경기병들이 이들을 뒤쫓았습니다.
30분 만에 끝난 전투, 압도적인 결과
전투는 30분도 걸리지 않았고, 프랑스군은 200명 이상이 전사하고 1,400명 이상이 포로로 잡혔습니다. 나머지 프랑스군은 지휘관의 인도로 간신히 탈출했습니다. 승자인 독일군의 손실은 가벼웠는데, 전사·부상 합계 116명에 불과했습니다. 전사자 대부분은 첫 번째 프랑스 방진의 일제사격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방진은 어떻게 무너지는가
방진이 돌파되는 것은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방진이 깨지는 경우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우연한 사건(예: 부상당한 말의 충돌), 둘째, 방진 지휘관의 오류(방어 사격 시점 판단 착오), 셋째, 방진을 이룬 병사들의 사기 저하입니다. 가르시아 에르난데스 전투에는 이 세 가지 요인이 모두 나타납니다.
유사한 사례로는 1809년 독일에서 검은 브라운슈바이크(Black Brunswicker) 기병이 훈련이 심각하게 부족한 베스트팔렌 보병의 방진을 돌파한 전투가 있습니다. 또한 1811년 알부에라 전투와 1815년 콰트르브라스 전투에서는 프랑스군이 웰링턴 휘하 보병 부대를 기습해 큰 피해를 입힌 바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행운은 승자 폰 보크에게까지 자비롭지 않았습니다. 1814년, 그는 아들 루트비히와 함께 스페인에서 영국으로 향하던 배가 난파하면서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보크가 근시였다는 점입니다. 공격 직전 그는 부관들에게 적이 어디 있는지 가리켜 달라고 부탁해야 했다고 합니다!

프랑스 보병을 향해 검격을 가하려는 독일 용기병.

왕립 독일 군단 제1중기병연대의 장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