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군이 전차에 본격적인 관심을 보인 것은 상대적으로 늦은 편이었다. 1920년대 중반부터 국산 전차 개발에 착수했지만, 당시 일본군은 프랑스 군사 교리를 따라 전차를 '보병 지원 무기'로만 간주했다. 이러한 인식은 훗날 소련군의 기갑 부대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순간, 치명적인 결과로 돌아오게 된다.
야스오카 지대의 편성
1939년 여름, 만주 국경의 할하강 유역에서 벌어진 노몬한 사건에서 일본군은 기갑전의 전문가로 평가받던 야스오카 마스오미(安岡正臣) 중장이 지휘하는 야스오카 지대를 투입했다. 이 부대의 편성은 다음과 같았다.
- 제3전차연대 — 4개 전차중대: 89식 중전차 26대, 97식 치하 4대, 97식 테케 경장갑차 4대, 94식 장갑차 7대
- 제4전차연대 — 95식 하고 35대, 89식 8대, 94식 3대
- 제64보병연대 및 제28보병연대 제2대대
- 포병중대
양면 공격 작전과 초기 진격
일본군은 두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하여 721 고지를 확보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야스오카 지대는 남쪽 축을 담당해 할하강 서안을 돌파하고 강 동안까지 진출하는 임무를 맡았다.
북쪽 축의 일본군은 721 고지를 점령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 포병의 집중 포격에 큰 타격을 입었고, 소련군의 강력한 역공을 막아내지 못한 채 후퇴했다.
남쪽의 야스오카 중장은 우익을 제28보병연대 제2대대로 엄호하게 하고, 적이 후퇴하고 있다고 판단해 기갑 부대에 추격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 오판이 화근이 되었다. 구성 부대 간의 속도 차이 때문에 지대의 결속력은 급속히 무너져 내렸다.
무질서한 진격, 무너진 협동
설상가상으로 무전기 부족으로 일본군 부대들은 서로 협조할 수 없었다. 1939년 7월 2일 밤부터 3일 새벽에 걸쳐 지대의 부대들은 아무런 조율 없이 흩어져 진격했다. 이후 며칠간 일부 부대는 비교적 순조롭게 전진했지만, 7월 5일부터는 끊임없이 강한 저항에 부딪혔고, 다른 부대들은 더 일찍 적과 조우한 뒤 진격을 멈춰 섰다.
소련군의 반격과 열세에 몰린 일본 전차
7월 3일 정오, 소련군은 포병의 지원을 받으며 보병과 전차로 제28보병연대 제2대대를 맹공했다. 일본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우익이 완전히 노출된 상황에서 지대의 기갑 부대는 연계 없는 단독 공격을 감행했고, 적에게 피해를 주는 대신 스스로 손실만 키웠다.
결정적인 문제는 화력과 방어력이었다. 89식과 97식 전차의 단포신 57mm 포, 그리고 95식의 37mm 포는 소련 전차를 상대로 무력했으며, 장갑 또한 턱없이 부족했다. 참고로 당시 일본 최강의 전차였던 97식 치하의 최대 장갑 두께는 겨우 25mm에 불과했다.
요시마루 대좌의 최후
악화된 상황 속에서 야스오카는 제3전차연대에 소련군의 요새화된 진지에 대한 공격을 명령했다. 그러나 연대장 요시마루 대좌의 97식 전차는 소련군 철조망에 구동륜이 엉키면서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정지한 일본 전차는 소련 BT-7 전차와 대전차포의 집중 사격을 받았다. 대좌의 전차는 폭파되었고, 제3전차연대의 나머지 전차 대부분도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유일한 성공, 다마다 연대의 야간 기습
반면 다마다 대좌가 지휘하는 제4전차연대는 상대적으로 성과를 거두었다. 야간 기습으로 소련군을 기습해 소련 포병 진지 깊숙이 돌파하는 데 성공했고, 최소 1개 중대를 무력화했다. 그러나 공격을 계속하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다마다 대좌는 신중하게 판단했다. 일본군 주력과의 연락이 끊긴 상태에서 추가 공격은 자멸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는 제4연대를 철수시켰다.
패배의 책임과 야스오카의 말로
어쨌든 제28보병연대 제2대대의 궤멸은 지대 공격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우익에 대한 위협 때문에 공격을 지속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패배로 야스오카는 1939년 7월 9일 해임되었다. 이후 예비사단 사령관 등을 맡다가 1941년 현역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1942년 자바 수라바야의 군정 사령관으로 재기용되었고, 점령지에서 잔혹 행위를 저질러 일본 항복 후 네덜란드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전범으로 처형되었다.
노몬한에 투입된 일본 전차들
97식 치하(チハ) 중전차
당시 일본군 보유 전차 중 가장 현대적이고 강력한 기종이었다. 단포신 57mm 전차포 1문과 기관총 2정을 장비했고, 최대 장갑 두께는 25mm였다. 도로에서 시속 38km의 최고 속도를 냈으며, 중량 15.5톤에 승무원은 4명이었다.
89식 이고(イ号) 중전차
97식 등장 이전 일본군의 주력 전차였다. 중량 약 15톤, 최대 장갑 두께는 겨우 17mm였다. 승무원 4명, 단포신 57mm 포 1문과 기관총 2정으로 무장했으며, 최고 속도는 시속 26km에 불과했다.
95식 하고(ハ号) 경전차
중량 8톤, 승무원 3명. 최대 장갑 두께는 불과 12mm였다. 37mm 포 1문과 기관총 2정으로 무장했고, 도로에서 시속 45km의 준수한 기동력을 보유했다.
97식 테케(テケ) 경전차
중량 5톤에 승무원 2명. 37mm 포 1문과 기관총 1정으로 무장했으며, 최대 장갑 두께는 16mm였다. 최고 속도는 시속 42km였다.
94식 장갑차(소전차)
중량 3.5톤, 최대 장갑 12mm, 승무원 2명. 무장은 6.5mm 기관총 1정뿐이었다. 최고 속도는 시속 40km였다.

만주에서의 일본군 전차와 보병.

일본 97식 전투전차.

일본 89식 전차.

일본 95식 하고 경전차.

일본 97식 테케 경전차.

일본 94식 장갑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