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에서의 패배는 끝이 아니었다
1683년 비엔나에서 터키(오스만 제국)가 겪은 패배는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계기였다. 그러나 이 승리가 곧바로 전쟁의 종식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신성로마제국(독일민족의 신성로마제국)은 승리에 힘입어 터키를 헝가리에서 완전히 몰아내겠다는 목표 아래 반격에 나섰고, 페스트(Pest) 탈환 이후에는 부다(Buda) 해방이 다음 목표가 되었다.
로렌 공작 샤를(Charles of Lorraine)이 지휘하는 제국군은 오늘날 부다페스트 북쪽 35km 지점에 있는 작은 도시 바츠(Vác)를 향해 진군했다. 이 일대는 부다의 카라 메흐메트 파샤(Kara Mehmet Pasha) 휘하 군대가 방어하고 있었다. 제국군은 다뉴브 강을 건너 비셰그라드(Visegrád)를 점령했고, 포로가 된 터키 병사들에게서 중요한 정보를 입수한다. 무스타파 파샤(Mustafa Pasha)가 이끄는 15,000명의 증원군이 카라 메흐메트에게 합류했으며, 무스타파가 직접 지휘권을 넘겨받았다는 것이었다.
양군의 기동
제국군이 페스트 방면으로 이동하자 터키군은 1684년 6월 17일 상대의 주요 보급기지인 에스테르곰(Esztergom)을 공격했다. 그러나 제국군이 신속히 이곳으로 이동하면서 요충지를 파괴하는 데는 실패했고, 터키군은 철수했다. 같은 시기 제국군은 폴란드와 헝가리 부대의 합류로 전력을 크게 보강했다.
6월 21일 제국군이 다시 진격에 나섰다. 적의 움직임을 파악한 무스타파는 카라 메흐메트에게 기병 15,000명과 보병 5,000명을 이끌고 바츠로 급행해 제국군의 전진을 차단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로렌 공작 샤를 역시 터키군의 동향을 간파하고 맞서기 위해 움직였다.
전열을 갖추다
두 숙적은 바츠 북서쪽에서 조우했다. 터키군은 베뢰체(Verőce) 마을 근처에 진지를 구축했는데, 좌익은 다뉴브 강에, 우익은 치가니 언덕(Gypsy Hill)에 기대어 있었다. 게다가 좌익 전면에는 광활한 늪지대가 펼쳐져 있어 이 방면으로의 공격은 거의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이 늪은 단 두 사람이 겨우 나란히 설 수 있을 만큼 좁은 통나무 다리로만 건널 수 있었다.
그러나 강력한 진지를 확보한 터키군과 달리, 지휘관 카라 무스타파는 부하들 곁에 남을 용기를 보이지 않았다. '용맹한' 파샤는 안전을 택해 일부 자료에 따르면 안전한 거리까지 물러나 있었다고 한다. 반면 샤를 공작은 보병과 기병을 혼합 배치한 진형을 명령했다. 수천 명의 터키·타타르 기병의 돌격으로부터 보병을 보호하는 동시에, 보병의 화망으로 기병을 엄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샤를은 우익의 지휘를 유명한 장군 루트비히 폰 바덴(Ludwig of Baden)에게, 좌익의 지휘를 팔츠노이부르크 공작(Duke of Palatinate-Neuburg)에게 맡겼다. 중앙은 샤를 자신과 빈의 구원자 에른스트 뤼디거 폰 슈타렘베르크(Ernst Rüdiger von Starhemberg)의 동생인 막시밀리안 폰 슈타렘베르크(Maximilian von Starhemberg) 원수가 함께 지휘했으며, 에른스트 본인도 이 전투에 참여했다. 샤를의 작계는 이러했다. 바덴 변경백의 부대와 자신이 이끄는 중앙군은 정면에서 늪지대의 터키군을 공격하고, 팔츠노이부르크 공작의 좌익은 적 우익을 포위 섬멸하기 위한 대규모 우회 기동을 감행한다는 것이었다.
포성이 울리고, 강철이 승부를 가르다
전투는 1684년 6월 27일 포병 교전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카라 메흐메트는 포병을 잘못된 위치에 배치하는 실수를 저질러 사선이 닿지 않는 사각지대를 만들었고, 적은 이를 그대로 이용했다. 당시의 대포는 곡선 탄도가 아닌 평사탄도를 날렸기 때문이다. 결국 터키군의 맹포격에도 불구하고 제국군은 거의 피해 없이 전진해 먼저 늪지대의 터키군을 공격했다. 병사들은 놀라운 용기를 발휘해 좁은 통나무 다리를 건너고 심지어 늪을 가로질러, 완전히 기습당한 터키군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즉시 그 자리를 방어하던 타타르 기병과 스파히(Sipahi) 기병대는 도주했다. 동시에 팔츠노이부르크 공작의 우월한 병력이 완벽한 타이밍에 예니체리(Janissary)가 방어하던 터키군 우익을 강타했다. 오스만 육군의 정예로 불리던 그들조차 규율 있는 화망과 기독교군의 돌파 기세를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고, 유명한 헝가리 후사르(Hussar) 기병대가 뒤쫓으며 손에 잡히는 예니체리에게는 조금의 자비도 베풀지 않았다. 최소 700명의 예니체리가 양떼처럼 학살당했다.
이후 카라 메흐메트의 군대는 지휘관이 없는 상태에서 단 한 번의 발포도 하지 못한 채 무질서하게 붕괴했다. 추격전에서 또 다른 2,300명의 터키 병사가 살해되었고, 바츠는 제국군에게 손쉽게 함락되었다. 수많은 터키 병사들이 포로로 잡혀 다뉴브 함대의 제국군 선박과 바지선 위에서 노예로 끌려갔다. 기독교 측의 전사자는 단 20명뿐이었다(다른 자료는 50~100명으로 추정한다). 어느 쪽 수치를 따르더라도 최소한의 피로 거둔 경이로운 승리임은 분명했다. 제국군은 여기에 더해 터키군의 모든 포병과 보급품도 손에 넣었다.
바츠에서의 압도적 승리는 제국군에게 부다로 통하는 길을 열어주었으나, 같은 해 가을 이어진 부다 포위전은 오스만군의 완강한 저항 앞에서 성공하지 못하며 전쟁은 길어지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