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들이 유대를 점령한 후 왜 유대인들의 종교 실천을 허용했는가?'라는 질문에는 흔한 역사적 오해가 숨어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로마 제국은 유대인의 종교를 처음부터 끝까지 자유롭게 허용하지 않았으며, 시대가 흐를수록 탄압은 더욱 가혹해졌습니다.
초기 로마 통치: 조건부 관용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유다는 로마의 지배 아래 들어갔습니다. 초기에는 유대인들이 비교적 종교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로마는 다신교 국가였기에 정복지의 전통 신앙을 즉각 금지하는 경우가 드물었고, 유대교도 일정 부분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받았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황제 숭배 참여 면제, 안식일 준수, 할례 등 고유한 종교 관습을 지킬 수 있는 특혜를 누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용은 어디까지나 조건부였으며, 언제든 철회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갈등의 심화와 대규모 반란
기원후 1세기에 들어서며 로마 총독들의 가혹한 통치, 과중한 세금, 종교적 모욕이 겹치면서 유대인들의 반감은 극에 달했습니다. 칼리굴라 황제가 예루살렘 성전에 자신의 신상을 세우려 한 사건은 대표적인 갈등 사례입니다.
결국 기원후 66년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이 발발했고, 그 결과 70년 예루살렘과 제2성전이 파괴되었습니다. 수많은 유대인이 학살되거나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예루살렘 추방: 탄압의 절정
131~135년 바르 코흐바의 난 이후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유대인의 예루살렘 거주를 금지하고, 도시 이름을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바꿔 로마 식민도시로 재건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매년 단 하루, 성전 터에서 슬픔을 표할 때만 도시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받았습니다.
즉, 로마는 유대인에게 종교의 자유를 너그럽게 허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박해했고 나아가 예루살렘 거주 자체를 금지했습니다.
결론
로마의 유다 통치는 일관된 정책이 아니었습니다. 초기에는 실용적인 차원에서 어느 정도의 종교적 관용을 보였지만, 잦은 반란 이후에는 성전 파괴, 예루살렘 추방, 종교 의식 제한 등 강경한 탄압으로 전환되었습니다. 따라서 '로마가 유대인의 종교 실천을 허용했다'는 전제 자체가 수정될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