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남서부, 가스코뉴 지방의 심장부에 위치한 제르(Gers) 주는 비옥한 토양이 빚어낸 미식과 여유로운 삶의 방식으로 유명하다. '삼총사'의 달타냥(d'Artagnan) 탄생지인 루피악(Lupiac)이 이곳에 있으며, 독특한 요새 교회들이 즐비한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제르 주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보물이 존재한다. 바로 갈로-로마 시대(Gallo-Roman)의 찬란한 유산이다. 역사 애호가라면 반드시 들러야 할 세 곳의 대표 유적지를 소개한다.
1. 렉투르 박물관 (Musée de Lectoure): 신앙과 일상이 공존하는 지하 보물창고

콩동(Condom) 동쪽에 자리한 렉투르(Lectoure)의 시청 지하실에 자리한 이 박물관은 입구부터 범상치 않다. 안내를 받아 아치형 지하 저장고로 내려가면, 고요하고 신비로운 분위기 속에서 수천 년의 역사가 펼쳐진다.
선사시대부터 갈리아 시대까지
전시는 구석기 시대 양면 석기(biface)와 가공된 순록 뿔 등 선사 유물로 시작된다. 소도시 박물관치곤 놀랍도록 풍성한 수장고를 지나면 갈리아 시대 전시실로 이어진다. 이곳의 하이라이트는 켈트족이 조각한 두 개의 인두상(人頭像)이다. 서로 다른 양식으로 조각된 이 두상은 인체 묘사를 금기시하던 갈리아 문화에서 극히 드문 사례라 학술적 가치가 높다. 토기, 체(colander) 같은 생활용품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갈로-로마 신앙의 중심지, 렉투르
본격적인 갈로-로마 전시실에서는 이 도시가 유피테르(Jupiter)와 키벨레(Cybele) 신앙의 주요 성지였음이 드러난다. 2~3세기 경 피레네 산맥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제단만 20기에 달하며, 대부분 황소(타우로볼리움)나 양(크리오볼리움)을 제물로 바친 피의 제사를 기록한 비문들이다. 유피테르상으로 추정되는 조각상과 페르시아계 신 미트라(Mithra) 상이 나란히 서 있어 당시 종교의 다층성을 보여준다.

이교 신앙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정교한 비늘무늬와 포도덩굴 가지로 장식된 초기 기독교 석관(sarcophagi)들은 이 지역이 일찍부터 기독교화되었음을 증명한다.
로마인의 일상을 엿보다
이어지는 전시실에는 모자이크 전용실을 비롯해 청동 검투사 상, 기름등잔, 숟가락, 동전, 뼈로 만든 배 모형 등 로마인들의 생생한 일상용품이 가득하다. 메로빙거 시대 유물 코너에는 허리띠 버클, 보석, 뼈 빗 등이 기증품으로 전시되어 있어 고대에서 중세 초기로의 연속성을 확인할 수 있다.
2. 세비아크 빌라 (Villa de Séviac): 갈리아 귀족의 호화 별장
콩동에서 서쪽으로 더 가면 세비아크(Séviac)에 이른다. 2천 년 전 지역 유력자의 저택이었던 이곳은 로마 건축 기술의 정수를 보여준다.
히포카우스트(Hypocaust) 난방 시스템
가장 인상적인 것은 히포카우스트 바닥 난방 시스템이다. 노예들이 아궁이를 지피면 뜨거운 공기가 기둥 위에 놓인 바닥 판 아래로, 그리고 벽 속 관로를 통해 순환하는 구조다. 목욕탕 시설(테르마에)도 갖춰져 온탕·냉탕·온수욕을 모두 즐길 수 있었다.
모자이크와 초기 기독교의 흔적
기하학적 무늬와 트롱프뢰유(trompe-l'œil) 기법으로 장식된 다수의 모자이크가 지붕과 모래 아래 보존되어 있다. 빌라 내부에는 사설 세례당(baptistery)이 마련되어 있어 기독교 전파의 속도를 실감케 한다. 빌라 인근에서는 메로빙거 시대 마을 터와 함께 '세비아크의 연인'이라 불리는 6~7세기 젊은 남녀 두 구의 유골이 발견되어 애틋함을 더한다.

몬트리올(Montreal) 마을 박물관
유적지에서 가까운 몬트리올 마을의 작은 박물관(입장 무료)에서는 세비아크 출토품들이 전시된다. 로마 시대 흉상(아마도 영주), 모자이크 조각, 프랑크족의 투척도끼 프란시스카(francisque) 철제품, 석주 등 이주민들이 갈로-로마 문화를 모방했음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흥미롭다. 베틀 부품, 대리석 장식 조각, 파이프, 열쇠, 추, 반지, 브로치, 허리띠 장식, 토기 등 소소한 생활용품도 가득하다. 심지어 구석기 시대 돌도끼와 사슴 뿔 도구, 제3기 동물 실물 모형까지 있어 선사시대까지 아우른다.
3. 오즈 박물관 (Musée d'Eauze): 화려한 포장 속 2만 8천 개의 동전

여정의 끝, 서쪽 끝 오즈(Eauze)에는 3세기 로마 동전 28,000점이 출토된 보물창고가 있다. 하지만 솔직히 실망스럽다. 입장료는 비싸고, 최신식 건물과 과도한 보안·조명 연출은 상업적 느낌만 준다. 정작 전시는 어두운 지하 통로의 유리창 너머로 나열된 동전 열람이 전부다.
동전 마니아(주화학 연구자)에게는 3세기 게르만족 침공 공포 속에 땅속에 묻힌 거액의 은닉 재산(당시 소농장 구입가 수준)이 매력적이겠지만, 일반 관람객에게는 다양성 부족과 전시 연출의 과잉만 남는다. 로마 주화에 특화된 관심이 아니라면 추천하기 어렵다.
이 짧고도 밀도 높은 여정의 결론은 명확하다. 제르 주의 진정한 갈로-로마 유산은 화려한 간판 아래가 아니라, 렉투르의 지하실이나 세비아크의 들판처럼 소박한 곳에 조용히 잠들어 있다. 역사의 향기를 따라 걸음을 옮기는 여행자라면, 이 숨은 보석들이 주는 감동이 훨씬 클 것이다.
더 알아보기
- 조르주 쿠르테스(Georges Courtès), 『제르 주를 알다(Connaître le Gers)』, 에디시옹 쉬드우에스트(Éditions Sud-Ouest), 2009.
- 자크 라파르(Jacques Lapart), 『제르(Gers)』, 아트(Atelier),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