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적 발견

중세의 지혜, 위조범을 막기 위해 송아지 대신 양가죽 두루마리를 쓰다

중세 유럽 일부 지역에서는 문서 위조를 막기 위해 다른 동물 가죽으로 만든 두루마리보다 양가죽 두루마리가 선호되었습니다.

중세의 지혜, 위조범을 막기 위해 송아지 대신 양가죽 두루마리를 쓰다

1499년 1월, 잉글랜드 미들섹스 엔필드(Enfield)의 토지 소유권 증서. 양가죽 양피지에 서명과 날인이 되어 있습니다.

사기꾼들의 문서 조작을 막고 원문의 무결성을 지키는 일은 13세기부터 당국의 오랜 고민거리였습니다. 당시 이 문제는 유언장, 재산 증서 등 법률 및 공증 문서의 특정 구절 삭제나 변조와 직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서 작성을 담당하던 필사관들은 이미 해결책을 찾아낸 듯했습니다. 바로 염소나 송아지(벨룸) 등 다른 가죽이 아닌, 양가죽 두루마리를 우선적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영국 엑서터대학교, 요크대학교, 케임브리지대학교 연구진이 영국·스코틀랜드·웨일스·아일랜드의 법률 아카이브를 조사해 학술지 '헤리티지 사이언스(Heritage Science)'에 발표한 연구에서 이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연구진은 질량분석기를 활용한 단백질 감정 방식으로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양피지 645점, 그중 622점이 양가죽인 샘플을 분석했으며, "양가죽의 고유한 구조 덕분에 텍스트를 부정하게 삭제하거나 수정하려는 시도가 눈에 띄게 드러났을 것"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송아지, 소, 양, 염소… 가죽마다 다른 특성

중세의 지혜, 위조범을 막기 위해 송아지 대신 양가죽 두루마리를 쓰다

18세기 양가죽 양피지에서 지워진 날짜의 흔적. ©헤리티지 사이언스

양은 진피 상층부 사이에 지방을 저장합니다. 그래서 양가죽은 지방 함유량이 매우 높습니다. 30~50%로, 염소가죽의 3~10%, 소가죽의 약 3%와 비교하면 압도적인 수치입니다. 양피지 제작은 몇 주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먼저 가죽에서 털과 살점을 제거한 뒤, 남은 불순물을 없애고 지방을 분해하기 위해 물과 생석회 욕조에 담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가죽의 지질이 분해되었습니다. 이후 가죽은 거터에 팽팽히 늘어졌고, 콜라겐 섬유는 이 장력에 따른 특정 방향으로 배열되었습니다.

그런데 양가죽은 무두질된 상태에서 시간이 지나며 열화될 때 독특한 성질을 보입니다. 가죽 표면층이 박리되어 마치 껍질이 벗겨지듯 얇은 막 형태로 떨어져 나가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쉽게 지워지지 않아서" 선택된 양가죽

논문 공동 저자들은 "잉크를 긁어내면 이 막들이 떨어져 나가면서 눈에 띄는 자국이 남아, 조금이라도 수정을 시도한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고 설명했습니다.

다만 연구에 참여하지 않은 파리 국립문서보관소 복원공방의 복원 전문가 에릭 라포레(Eric Laforet)는 "자발적인 기계적 손상이 없는 한, 석회 처리 후 신장 건조된 양가죽 양피지에서 박리 현상은 드물다"라고 보완적으로 지적했습니다.

논문 저자들은 "당시 필사관들이 문서의 진정성과 보안을 걱정했다면, 그 노력은 동물 가죽을 선택하는 단계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우리 연구가 보여준다"고 덧붙였습니다.

12세기 문헌 역시 이를 뒷받침합니다. 헨리 2세와 리처드 1세 치세의 왕실 재무장관이었던 잉글랜드의 리처드 피츠닐(Richard FitzNeal, 1130~1189)에게 귀속되는 문서 '재무부 대화록(Dialogus de Scaccario)'은 왕실 회계 기록 보관에 양가죽 두루마리를 사용하라고 권하며, 그 이유로 "흠집이 드러나지 않고는 쉽게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또한 공식 기록의 오류를 수정할 때 필사관은 해당 문구를 지우는 대신 선을 그어 지운 뒤, 그 윗줄에 정정 내용을 명확하게 적는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여기에 북유럽을 중심으로 한 양가죽의 풍부한 공급량과 낮은 비용도 이러한 양피지가 19세기 말까지 계속 선택된 배경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번 연구는 수십만 건씩 생산된 평범한 법률 문서 등 간과되기 쉬운 양피지 문서에서 새로운 통찰을 끌어내는 '바이오코디컬로지(biocodicology, 양피지 분자 연구)' 분야의 부상을 확인해 주는 성과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