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적 발견

10세기 오토 대왕의 거처였던 헬프타 왕궁 유적에서 웅장한 교회와 400여 기의 무덤 발굴

독일 작센안할트주에 위치한 구(舊) 헬프타 왕궁(Helfta) 유적지에서 장엄했던 교회의 흔적과 함께 400기가 넘는 무덤이 발굴되었다. 이곳은 10세기 동프랑크 왕국의 왕이자 로마 황제로 즉위한 오토 왕조(Ottonian dynasty)가 머물렀던 왕실 궁정 자리다.

10세기 오토 대왕의 거처였던 헬프타 왕궁 유적에서 웅장한 교회와 400여 기의 무덤 발굴

구 헬프타 궁전 유적에서 진행된 고고학적 발굴 조사에서는 400기 이상의 무덤이 확인되었으며, 그중 일부는 성 라데군데(Sainte-Radegonde) 교회 밖에 조성된 부장묘이다.

종교개혁의 도시 아이슬레벤에 숨겨진 중세의 비밀

작센안할트주의 아이슬레벤(Eisleben)은 종교개혁의 아버지 마르틴 루터(1483~1546)가 태어나고 생을 마감한 도시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16세기 종교개혁은 사회 저항 운동이라는 측면도 지녔고, 이는 루터의 고향 도시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농민전쟁과 종파 간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건축물이 파괴되었는데, 여기에는 시 외곽 헬프타에 세워졌던 13세기 시토회 산타마리아 수도원도 포함되었다.

더 오래된 건축물들 역시 같은 운명을 겪었으며, 그 흔적은 2009년 물리탐사 과정에서 처음 확인되었다. 이후 2021년 5월부터 9월까지 진행된 발굴 조사를 통해 규모가 상당한 유구가 모습을 드러냈고, 이는 중세 초기 말기, 즉 오토 왕조 시대에 헬프타가 매우 중요한 거점이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헬프타 왕궁, 오토 대왕이 세운 거점

헬프타라는 지명이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카롤링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9세기 말 제국 수도원인 헤르스펠트(Hersfeld) 수도원에 납부하는 십일조 목록에 '헬피데(Helpide)' 또는 '헬프히데스부르크(Helphidesburg)'라 불리는 정착지가 기록되어 있다.

10세기에는 동프랑크의 왕이자 962년부터 로마 황제였던 오토 대왕(Otto der Große, 912~973)과 그의 아들 오토 2세(955~983)가 적어도 두 차례 이상 이곳에 머문 것으로 전해지며, 이는 헬프타가 색슨 왕조인 오토 가문의 왕실 궁정 기능을 수행했음을 보여준다. 튀링겐의 멤레벤(Memleben) 궁정이나 최초의 독일 제국 수도였던 작센안할트의 퀘들린부르크(Quedlinburg)에 비해서는 덜 알려졌지만, 헬프타 궁정은 저명한 역사가 메르세부르크의 티트마르(Thietmar von Merseburg)가 1012년부터 1018년 사이에 집필한 연대기에 언급되어 있다.

연대기에 따르면 오토 대왕은 960년대에 이곳에 머무는 동안 할버슈타트의 베른하르트 주교에게 헬프타 교회를 라데군데(Radegund)에게 봉헌하도록 했다. 라데군데는 튀링겐의 공주로서 프랑크의 클로타르 1세 국왕과의 혼인으로 프랑크 왕비가 되었고, 587년 사망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성인으로 시성된 인물이다. 같은 문헌에 따르면 황제 오토 2세 또한 980년에 헬프타에 머물렀다고 한다.

종교개혁기에 철저히 파괴된 거대한 궁정 단지

작센안할트주 문화재보존·고고학청(LDA) 소속 고고학자들이 진행한 발굴 조사는 종교개혁기에 철거된 헬프타 궁정을 구성하던 건축물들의 흔적을 비교적 빠르게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흥미로운 점은 지층에 대한 물리탐사 결과로 드러난 사실이다. 카롤링거 시대(8~9세기)의 정착지와 오토 왕조의 왕실 궁정(10세기)은 현재 아이슬레벤 동쪽에 위치한 헬프타 지역 부지가 아니라, 서쪽으로 더 나아간 두 개의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곡물밭이 펼쳐진 그곳에는 계곡을 굽어보며 '클라이네 클라우스(Kleine Klaus)'라 불리는 언덕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주거 및 방어 시설 복합단지가 들어서 있었고, 그 언덕 위에는 장엄한 성 라데군데 교회가 우뚝 섰다.

성 라데군데 교회, 미니어처 대성당

2021년 발굴 조사의 핵심은 오토 1세가 968년 이전에 건립한 이 교회의 유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발굴 초반 몇 주 만에 노출된 기단벽들은 이 건축물의 특별함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발굴을 지휘한 펠릭스 비어만(Felix Biermann) — 작센안할트 LDA 소속 연구원이자 슈체친 대학교(폴란드)의 중세 초기 고고학 교수 — 에 따르면, 궁정 교회의 크기를 훌쩍 넘어서는 이 건축물의 화려함은 오토 왕조 시대 이 유적지의 위상을 증명한다.

'미니어처 대성당'이라 불릴 만한 이 교회는 세 개의 본당(네이브)을 갖춘 바실리카 형식으로, 길이 약 30미터, 폭 약 20미터에 달한다. Sciences et Avenir와의 인터뷰에서 비어만은 이 발견의 고고학적 의의를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이 교회는 후대에 추가 증축 없이 오토 왕조 교회의 축조 방식과 평면 구조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건축사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발견입니다."

건축물의 과거 영화는 출토된 유물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약 15센티미터 높이의 그리스도 입상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 입상은 얼굴에 금박을 입히고 몸통에는 청색 에나멜을 칠해 장식했으며, 원래는 동판으로 덮인 나무 십자가에 부착되어 행렬용 십자가나 제단 장식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궁정 교회가 지역 순례 교회로 변모하면서 활용되었을 것이다. 비어만은 이 입상이 13세기 리모주(Limoges)에서 제작된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중세 전기와 후기에 리모주에는 에나멜 공예의 중요한 장인 공방들이 있었고, 그 생산품들은 큰 인기를 끌며 널리 유통되었습니다."

10세기 오토 대왕의 거처였던 헬프타 왕궁 유적에서 웅장한 교회와 400여 기의 무덤 발굴

교회에서 출토된 에나멜로 장식된 비철금속 로마네스크 십자가, 복원 작업 직전의 모습. © Friederike Hertel / Landesamt für Denkmalpflege und Archäologie Sachsen-Anhalt

오토 왕조 엘리트들의 묘지

성 라데군데 교회는 단순한 예배 공간이 아니었다. 이곳은 다수의 매장이 이루어진 묘지이기도 했다. 고고학자들은 건물 내부와 주변에서 10세기부터 15세기에 걸친 400기가 넘는 무덤을 발굴했으며, 그중 일부는 벽감묘와 벽돌묘 등 매우 정교한 형태로 조성되어 있어 지역 고위 성직자·귀족 가문이 안치되었음을 시사한다.

비어만이 가장 주목한 것은 흰 패각석(貝殻石)으로 정성껏 가공하고 적갈색 회척스테인 석판으로 덮은, 머리 부분에 벽감을 파낸 소형 석관이다. 약 천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석관에는 두개골을 제외한 골격이 완전하게 보존된 4~5세 아동이 안치되어 있었다. 비어만은 "이 무덤은 교회의 중요한 위치에 매장되어 있어 특히 인상적"이며, "다른 모든 무덤과 구별되고, 요절한 이 아이는 분명 오토 왕조 시대의 유력한 귀족 가문 일원이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석관은 통째로 발굴되어 할레(Halle)의 주립박물관으로 옮겨졌으며, 과학적 분석을 거친 뒤 전시될 가능성이 높다.

10세기 오토 대왕의 거처였던 헬프타 왕궁 유적에서 웅장한 교회와 400여 기의 무덤 발굴

벽감이 있는 석관은 머리 부분에 둥근 처리가 된 사다리꼴 형태의 덮개를 갖추고 있다. © Normen Posselt / LDA

무덤들에서는 다양한 부장품도 다량 출토되었다. 8세기부터 16세기에 이르는 장식판과 벨트 버클, 귀걸이, 주화, 칼과 각종 도구들, 그리고 특히 카롤링거·오토 왕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비철금속 재질의 피뷸라(fibula, 옷핀)가 많았는데, 상당수는 에나멜과 유사 상감으로 장식되어 있다. 비어만에 따르면, 부식이 심해 눈에 잘 띄지 않을 수 있는 이 작은 금속 조각들이 현재 LDA 복원 작업장에서 "화려한 보석류와 정교하게 장식된 의복 장식품"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신성로마제국의 핵심 거점

10세기 말 건립된 성 라데군데 교회는 철거되기 전까지 무려 500년간 이 지역을 내려다보며 군림했다. 고고학자들에게 이 교회의 특출난 규모, 방대한 매장의 수, 클라이네 클라우스 언덕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헬프타가 오토 대왕에게 매우 중요한 거점이었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다.

비어만은 당시 궁정(Pfalz)이야말로 "제국의 결절점(nodal points)"이었다고 설명하며, 이는 "기지이자 임시 거처"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덧붙였다. 주권자는 늘 궁정을 대동한 채 왕국 곳곳을 순행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불과 100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여러 궁정을 오가며 수주 혹은 수개월씩 머물며 권위를 행사했다. 재판을 집행하고 사절단을 접견하며 중요한 종교 축일을 거행한 곳이 바로 이런 궁정들이었다.

2021년 9월 초 마무리된 이번 발굴 조사는 내년에 재개될 예정이며, 다음 단계에서는 성벽과 주거 시설 단지를 탐사·발굴하는 것이 목표다. 현 독일 영토를 넘어 이탈리아까지 뻗어 있던 거대 제국을 다스린 오토 왕조의 군주들에게 이 유적이 어느 정도의 의미를 지녔는지, 앞으로의 발견이 더욱 분명하게 밝혀주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