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두카이 카툰(Мандухай хатан, Mandukhaï Khatun, 1449년경~1510)은 '만두카이 세첸 카툰(Mandukhaï Sechen Khatun)', 즉 '현명한 여왕 만두카이'로도 불리는 인물로, 제국 시대 이후의 몽골에서 남편과 함께 몽골 부족들을 재통일한 여왕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는 몽골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지도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오늘날 몽골에서는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권력 장악
옹구트(Ongüt) 몽골족(터키·몽골 계통 부족)의 고문이었던 초로스바이(Chorosbai)의 딸로 태어난 만두카이는 1449년경 몽골 동부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18세가 되던 해, 그녀는 자신보다 열 살 연상인 북원(Northern Yuan) 왕조의 만두울(Manduulu)과 혼인했습니다.
1465년 몰론 칸(Molon Khan)이 사망한 뒤 칸의 자리는 오랫동안 공석으로 남았고, 몽골 씨족들은 권력을 두고 치열하게 다투었습니다. 1475년에야 만두울이 즉위해 만두울 칸(Manduul Khan)이 되었는데, 만두카이는 그의 아내가 되어 딸 하나를 낳았습니다. 반면 칸의 첫 번째 아내였던 예케 하바르투 융긴(Yekhe Khabartu Yungin)은 자녀가 없었고, 이러한 조건 덕분에 만두카이는 그녀를 밀어내고 후궁의 실권을 쥐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478년 만두울 칸이 급서하면서 상황이 급변합니다. 그는 고문 이스멜(Ismel)에게 독살당했을 가능성이 제기되며, 남계 후사가 없어 왕위는 다시 공석이 되었습니다. 이스멜과 귀족 장군 우누볼드(Unubold)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왕위와 젊은 왕비를 노렸습니다. 이 위기 속에서 만두카이는 숨겨져 있던 일곱 살 고아 바투몽케(Batu-Möngke)의 존재를 밝혀냈습니다. 그는 칭기즈칸의 마지막 직계 후손이었습니다. 그녀는 그를 거두어 기른 뒤, 그의 명망 높은 혈통을 내세워 다얀 칸(Dayan Khan)으로 옹립했습니다. 새 칸이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만두카이가 섭정으로서 실질적인 몽골의 지휘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몽골 부족의 통일
서부 몽골 부족인 오이라트(Oirats, 칼무크라고도 불림)와 전쟁 중이던 만두카이 카툰은 직접 군을 이끌고 싸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큰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녀와 다얀 칸은 패배한 오이라트에 무장 규제와 칸에 대한 예의 표시 의무 등 일련의 규칙을 부과해 응징했습니다. 오이라트의 복속으로 분열되어 있던 몽골 부족들은 비로소 하나로 통합되었습니다.
다얀 칸이 열아홉 살이 되자 만두카이는 그와 결혼하여 자신의 권력과 정당성을 한층 굳건히 다졌습니다. 그녀는 다얀 칸을 칭기즈칸을 기리는 성지인 '여덟 개의 흰 궁장(八白室, Eight White Yurts)'에 다시 모시며 그의 지위를 공식화했습니다. 이후 오이라트가 다시 봉기하자 여왕은 임신한 몸으로도 지휘관의 자리를 지키며 군대를 이끌고 나섰고, 전투 도중 쌍둥이 아들을 낳기도 했습니다. 만두카이는 다시금 오이라트를 격파하며 몽골의 통일을 지켜냈습니다.
명나라와의 갈등
서부 몽골 부족을 정복한 뒤에는 중국 명나라와의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1480년부터 여왕과 다얀 칸은 중국과의 교역을 차단하고 국경 지대에 산발적인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에 명나라는 만리장성을 확장해 방어태세를 강화하는 한편, 몽골 영내로 침공을 단행하며 맞섰습니다.
만두카이 카툰의 최후
만두카이 카툰은 1510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의 죽음에 관해서는 기록에 따라 이견이 존재합니다. 대부분의 사료는 자연사였다고 전하지만, 어떤 설에 따르면 중국군의 공격 이후 궁으로 돌아온 만두카이가 이스멜이 왕좌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와 대치했으며, 끝내 이스멜이 고용한 궁수의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고 합니다. 또 다른 설에서는 남편의 첩에게 살해되었다고도 전합니다. 다만 이 두 가지 이야기는 지금까지 입증된 바 없습니다.
만두카이 카툰은 혼란의 시기에 몽골을 통합하고 다얀 칸의 집권 기반을 마련한 인물로, 몽골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여성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오늘날까지 기억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