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민권운동가 아멜리아 보인턴 로빈슨(Amelia Boynton Robinson, 1911~2015)은 1965년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선거권을 요구하며 벌어진 '셀마~몽고메리 행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입니다.
헌신적으로 자란 소녀
아멜리아 이소도라 플래츠(Amelia Isadora Platts)는 1911년 8월 18일, 미국 남동부 조지아주 서배너에서 애나 엘리자 플래츠와 조지 플래츠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아홉 명의 형제자매와 함께 인종 차별이 만연하고 백인 우월주의 단체 KKK(쿠 클럭스 클랜)의 영향력이 강한 남부에서 성장했습니다.
부모님은 아이들에게 독서와 학습, 자기계발을 권장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아멜리아는 여성 참정권 운동에 참여했고, 1920년 미국 헌법 수정 제19조로 여성에게 투표권이 확대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혜택은 최소한 '백인 여성'에게 국한된 것이었습니다. 수정 제15조는 이미 1870년부터 "미국 시민의 투표권은 인종, 피부색 또는 예속 상태를 이유로 거부되거나 제한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많은 주들은 재산이나 교육 수준 같은 조건을 내세워 흑인의 투표를 사실상 배제했습니다.
아멜리아는 조지아주 유색인종 청년 산업대학(현 서배너 주립대학교)에서 2년간 수학한 뒤, 앨라배마주 터스키기 대학(현 터스키기 대학교)에서 가정학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잠시 교직에 몸담은 후 앨라배마주 셀마로 옮겨 '홈 데모스트레이터'로 활동하며 농업과 가사, 식품 가공, 영양, 보건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해 지역 주민들을 교육했습니다.
선거권 박탈의 장벽
1934년 아멜리아는 유권자 등록에 성공했지만, 당시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앨라배마주를 비롯한 남부 주들이 흑인의 투표 접근을 차단하는 일련의 '선거권 박탈(disenfranchisement)' 법안을 통과시켰기 때문입니다. 유권자 등록에는 교육·문해 능력 조건이 붙었고, 백인 유권층에 불이익이 가지 않도록 '양심 조항(good character clause)'과 '조부 조항(grandfather clause)'이 추가되었습니다. 즉 문맹자라도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1867년 이전에 투표했다면(노예의 후손은 배제) 투표권을 얻을 수 있었고, 심사위원회가 '시민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이해할 수 있는 양심적 인물'로 판단하면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이러한 장치는 흑인 시민뿐 아니라 빈곤한 백인들까지 배제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1936년, 25세의 아멜리아는 새뮤얼 윌리엄 보인턴과 결혼하여 두 아들 빌 주니어와 브루스 카버 보인턴을 낳았고, 훗날 조카딸 샤론과 저메인을 입양했습니다. 부부는 적극적인 활동가로서 시민권 관련 단체들을 지원했습니다. 아멜리아는 또한 셀마에 커뮤니티 센터 건립 기금을 모으기 위해 흑인 영가(spiritual) 음악의 탄생을 다룬 희곡 『세월 속에서(Through the Years)』를 집필했습니다.
보인턴 대 버지니아 사건
1954년 아멜리아와 새뮤얼은 몽고메리의 한 교회에서 목회하던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와 그의 아내 코레타 스콧 킹을 만났습니다. 이듬해 로자 파크스의 행동으로 촉발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을 계기로 마틴 루터 킹은 미국 민권운동의 핵심 지도자로 성장합니다.
1958년, 부부의 둘째 아들 브루스는 백인 전용 식당에서 햄버거와 차를 주문하다 체포되어 하룻밤을 감옥에서 보낸 뒤 10달러의 벌금형을 받았습니다. 그는 항소했지만 1심에서 패했고, 사건은 결국 미국 연방대법원에 넘어갔습니다. 대법원은 2년 후 '보인턴 대 버지니아(Boynton v. Virginia)' 판결을 통해 브루스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앨라배마 최초의 흑인 여성 후보
새뮤얼이 세상을 떠난 1963년 이후, 아멜리아는 자신의 집을 셀마 민권운동의 논의·전략·조직의 중심지로 바꾸어 나갔습니다. 흑인 선거권 운동이 본격화되면서 활동가들은 법원 앞에서 시위와 집회를 열며 유권자 등록을 요청했지만 대개 좌절했습니다. 활동가 애니 리 윌커슨 쿠퍼 역시 1962년과 1963년 두 차례나 등록을 거부당했습니다. 투표권은 NAACP와 마틴 루터 킹의 SCLC(남부 기독교 지도자 회의) 같은 민권 단체들의 핵심 현안이었습니다. 진정한 정치적 대표성 확보야말로 권리 신장의 출발점이었기 때문입니다.
1964년 아멜리아는 흑인 시민들의 유권자 등록과 투표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앨라배마주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했습니다. 앨라배마주 최초의 흑인 여성 후보이자, 동주 민주당 최초의 여성 후보라는 개척적인 도전 끝에 그녀는 약 10%의 득표율을 기록했습니다.
피의 일요일, 셀마의 발걸음
1965년 초, 젊은 흑인 활동가 지미 리 잭슨이 선거권 시위 중 경찰의 총격으로 숨졌습니다. 이에 아멜리아는 약 80km 떨어진 몽고메리까지 이어지는 대규모 항의 행진을 주도하고 공동 기획했습니다. 호지아 윌리엄스와 존 루이스가 이끄는 600명의 활동가들이 1965년 3월 7일 셀마를 출발했지만, 몇 마일 떨이지 않은 곳에서 지방 경찰과 폭력적인 무리에 의해 저지당해 잔혹하게 구타당했습니다. 약 70명의 활동가가 다치는 이날은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로 역사에 기록되었고, 경찰의 구타로 쓰러진 채 의식을 잃은 아멜리아의 모습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러더니 그들이 돌격했습니다. 오른쪽에서 왔고 왼쪽에서도 왔습니다. 한 경관이 '뛰어!'라고 외쳤지만 저는 '왜 내가 도망쳐야 하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말을 탄 경관이 제 어깨 뒤편을 후려쳤고, 이어 목덜미까지 때렸습니다. 저는 의식을 잃었습니다."
이런 고통에도 불구하고 아멜리아는 이틀 뒤 마틴 루터 킹과 함께 다시 행진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같은 장소에서 또다시 유혈 사태가 반복될 것을 우려한 참가자들은 중도에 되돌아왔습니다. 마침내 세 번째 행진에서 3월 21일 셀마를 출발한 약 2만 5천 명의 행진대열이 5일간의 행군 끝에 주도 몽고메리에 입성하며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선거 접근에서의 인종 차별을 금지하는 『선거권법(Voting Rights Act)』은 1965년 8월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서명으로 발효되었고, 아멜리아 보인턴은 서명식에 영예로운 손님으로 초대받았습니다.
아멜리아는 1969년 밥 W. 빌럽스, 1976년 제임스 로빈슨과 재혼했습니다. 이후 1984년 쉴러 연구소 부소장으로 임명되어 2009년까지 재직했으며, 1990년에는 마틴 루터 킹 자유 훈장을 받았습니다. 아멜리아 보인턴 로빈슨은 104번째 생일을 보낸 지 며칠 뒤인 2015년 8월 세상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