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굴 야영지 기습 작전
대관식과 왕태후·공주들의 장례 의식 등 여러 행사를 모두 마친 시바지는 이제 비마(Bhima) 강 인근 펜드가온(Pendgaon)에 주둔하고 있던 무굴 총독 바하두르 칸에게 시선을 돌렸습니다. 아우랑제브가 디레르 칸을 다시 델리로 소환한 상황이었기에, 바하두르 칸은 남부에서 무굴 세력을 대표하는 유일한 인물이 되어 있었습니다.
시바지의 대관식 직후 그 지역에는 폭우가 내렸지만, 시바지는 비를 무릅쓰고 기병 2,000명을 파견해 무굴군을 공격했습니다. 작전 계획은 이러했습니다. 먼저 마라타 군이 무굴군에 정면으로 도전해 적을 진영에서 멀리 유인해 낸 뒤, 시바지가 기병 7,000명을 이끌고 배후에서 무굴 진영을 급습해 궤멸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계획은 성공적으로 실행되었습니다. 시바지는 무굴 진영에 불을 질렀고, 황제에게 바치기 위해 모아둔 보물 2천만 루피(2크로르), 말 200필, 각종 귀중품을 약탈했습니다. 같은 해 10월 중순에는 시바지의 군대가 다시 바하두르 칸의 진영을 포위했으며, 아우랑아바드 인근 여러 도시를 약탈한 뒤 바글라나와 카데시 지방으로 진입해 한 달 가까이 무굴 영토를 유린했습니다.
조약 협상과 아우랑제브의 분노
시바지는 한편으로 바하두르 칸을 상대로 군사 행동을 계속하는 동안, 다른 한편으로는 바하두르 칸을 통해 아우랑제브에게 조약 체결을 제안했습니다. 제안의 골자는 이랬습니다. 아우랑제브가 자신의 아들 삼바지에게 '하자리(7,000명급)' 만사브(관등)를 임명하면, 그 대가로 시바지가 자신의 요새 17개를 헌납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바하두르 칸은 추천서를 곁들여 이 제안을 아우랑제브에게 전달했고, 황제는 조약을 수락했습니다. 그러나 황제의 승인이 도착하자마자 시바지는 태도를 일변해 조약을 저버렸습니다. 격분한 아우랑제브는 매우 거친 문구의 서신을 바하두르 칸에게 보내며 그를 남부로 되돌려 보냈습니다.
이에 바하두르 칸은 새로운 구상을 세웠습니다. 무굴 제국이 비자푸르와 골콘다와 각각 조약을 맺고, 세 세력이 힘을 합쳐 시바지를 함께 공격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아우랑제브 역시 이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시바지의 대관식 소문은 인도 전역에 크게 퍼져 있었고, 인도에 힌두 왕국이 다시 세워질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아우랑제브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시바지를 제거하고자 했습니다.
베다누르 원정
그 무렵 시바지는 카나라 방면으로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베다누르(Vedanur)의 티만나 여왕은 자국 사령관이 자신을 무시한다며 시바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밀서를 보냈습니다. 시바지는 여왕을 돕겠다고 약속하는 대신 베다누르에 차우트(Chauth, 보호세)를 부과할 것을 조건으로 제시했고, 티만나 여왕은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시바지는 사령관을 제압해 여왕을 지원했고, 베다누르 왕국으로부터 차우트를 걷어들였습니다.
후계자 삼바지의 타락과 시바지의 병환
삼바지는 오랫동안 아우랑제브의 아들 무아잠과 접촉해 왔고, 그 과정에서 사상이 타락해 있었습니다. 덕분에 전쟁이나 백성에 대한 관심은 희미했고, 늘 술에 취해 여인들과 어울리며 지내곤 했습니다. 미래의 마라타 왕이 될 인물의 이런 모습을 본 시바지는 깊은 근심에 빠졌습니다.
이러한 고민이 누적된 끝에 서기 1675년 말, 시바지는 중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의 병세 소식은 바람처럼 퍼져 나갔고, 이윽고 시바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문까지 돌았습니다. 그러나 의사들의 치료 덕분에 시바지는 서서히 회복되었고, 건강을 되찾은 뒤에는 다시 힌두 제국 건설의 위업에 몸을 담았습니다.
무함마드 쿨리 칸, 즉 네타지 팔카르의 귀환
한때 시바지의 오른팔로 불리며 '제2의 시바지'라 칭송받던 네타지 팔카르(Netaji Palkar)는 자이싱을 통해 아우랑제브의 무굴 군에 끌려 들어가 이슬람으로 개종한 뒤, 아프간 국경에서 8년간 복무하며 '무함마드 쿨리 칸'이라 불리고 있었습니다.
아우랑제브는 이제 무함마드 쿨리 칸을 시바지 상대로 내세우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시바지 왕국의 지리적 조건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황제는 디레르 칸도 함께 남부로 파견하기로 했습니다. 디레르 칸 역시 남부에서 여러 해를 복무하며 시바지와 싸운 경험이 풍부한 장수였습니다. 두 무굴 장군은 시바지의 수도 사타라 근처에 진을 쳤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무함마드 쿨리 칸은 무굴 진영을 몰래 빠져나와 곧장 시바지의 피난처로 달려갔습니다. 그는 시바지에게 정화 의식을 거쳐 다시 힌두교도로 받아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시바지는 오랜 동지를 되찾기 위한 정화 절차를 마련했고, 네타지 팔카르는 1676년 6월 19일 힌두교로 재입교했습니다. 이후 그는 평생 시바지를 섬겼으며, 시바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삼바지에게 변함없는 충성을 다했습니다. 결국 아우랑제브의 이번 공작 역시 허탈하게 무산되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