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핵에너지 80년사: 폭탄에서 전기까지, 희망과 공포를 동시에 품은 기술

핵에너지 80년사: 폭탄에서 전기까지, 희망과 공포를 동시에 품은 기술1930년대 후반, 우라늄 원자핵이 분열하며 막대한 에너지를 방출하는 핵분열 반응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에너지는 인류 문명 전체를 파괴할 수도, 전기를 생산할 수도 있는 양면성을 지녔습니다. 국가적 지원 아래 발전해 온 원자력은 오늘날 세계 전력의 약 15%를 담당하며, 프랑스에서는 그 비율이 80%에 이릅니다. 높은 위험도에도 불구하고 이 기술은 여전히 에너지 문제, 나아가 기후 문제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1945년, '핵 시대'의 개막

"석탄도, 석유도, 백석탄(수력)도 없이 세상은 지상낙원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 1945년 말 에두아르 자케(Édouard Jacquet)가 리옹에서 출간한 소책자에 실린 이 문장은, 히로시마(1945년 8월 6일)와 나가사키(같은 해 8월 9일)에 투하된 원자폭탄 이후 원자력이 불러일으킨 희망과 의혹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새로운 무기의 파괴력이 언론을 타고 전 세계에 알려지며 열린 '핵 시대'는 처음부터 이러한 이중적 인식 속에서 출발했습니다.

핵에너지 80년사: 폭탄에서 전기까지, 희망과 공포를 동시에 품은 기술20세기 전반의 과학 연구 속에서 방사능은 의료 분야와 연결되었습니다. 1920년대부터는 방사선 요법이 피부암 치료에 활용되었고, 토라디아(Tho-Radia) 같은 회사는 1937년 금지될 때까지 화장품에 토륨과 라듐 염을 첨가하며 방사능의 '긍정적 이미지'를 대중화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광고업계는 제품 홍보에 방사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소다수 브랜드 '조에(Zoé)'는 1948년 12월 12일 사클레에서 임계에 도달한 프랑스 최초의 원자로에서 이름을 따왔습니다. 수영복 '비키니' 역시 미국이 핵실험을 진행하던 마셜군도의 환초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폭탄이 대중문화에 남긴 흔적입니다.

이러한 양가적 상상력은 1960년대 중반까지 원자력을 바라보는 구체적 전망에 그대로 투영되었습니다.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에서 '트리니티(Trinity)'라는 코드명으로 최초의 핵실험을 실시한 미국에 이어, 소련은 1949년 8월 첫 실험을 성공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도 각각 1952년과 1960년 핵보유국 반열에 올랐습니다. 빅사이언스의 결정체인 원자폭탄은 '핵보유국 클럽'의 경계를 그었고, 대기권 핵실험이 늘어날수록 방사성 오염은 현실화되었습니다.

군비 경쟁을 제어하려는 움직임(핵무기 수는 1955년 약 3,000발에서 10년 뒤 37,000발로 급증)도 이어졌습니다. 1955년 7월의 러셀-아인슈타인 선언 같은 평화주의적 호소, 1950년의 스톡홀름 평화 호소처럼 숨은 정치적 의도가 있었던 사례, 1958년부터 매년 런던에서 앨더마스턴으로 이어진 반핵 행진, 그리고 1968년의 핵비확산조약(NPT)이 그것입니다. 원자력은 인류 문명 전체의 파괴를 현실적으로 경고한 최초의 기술이었습니다. 1996년에는 핵실험 모라토리엄이 채택되었으나, 이후 인도·파키스탄·북한 등 새로운 핵보유국에 의해 이 규범은 여러 차례 위반되었습니다.

폭탄 옆에서 자란 원자로

1942년 12월 2일,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 팀이 시카고에서 최초의 실험용 원자로를 가동시킨 순간부터 원자력의 민간 활용은 군사 기술의 단순한 파생물이 아니라 자체적 논리를 지닌 분야로 구상되었습니다. 1946년 설립된 미국 원자력위원회(AEC)는 이러한 응용을 연구했습니다. 대중과학지를 통해 널리 알려진 원자력 추진은 결국 소수의 민간 선박과 군용 잠수함(1954년 USS 노틸러스)에 머물렀고, 원자력 기관차·자동차·비행기는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운하나 터널 굴착, 항만 조성에 핵폭발을 활용하려던 '플라우셰어(Plowshare)' 계획 역시 수십 차례의 실험으로 종결되었습니다.

핵에너지 80년사: 폭탄에서 전기까지, 희망과 공포를 동시에 품은 기술결국 발전이 민간 활용의 주류로 자리 잡았습니다. 초기에는 미국이 기술 비밀을 고수했지만,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평화를 위한 원자(Atoms for Peace)' 구상(1953)을 발표하면서 세계 시장, 특히 유럽으로의 기술 확산이 본격화되었습니다. 1951년 초 원자력에 의한 전기 생산이 처음 이루어졌고, 진정한 산업적 전환점은 1954년 민간 기업에 원자로 건설이 위탁된 때였습니다. 웨스팅하우스는 펜실베이니아주 쉬핑포트에 가압경수로를, 제너럴 일렉트릭은 일리노이주 모리스에 비등수로를 건설했습니다.

처리하기 어려운 폐기물

소련은 1954년 오브닌스크에서 세계 최초의 민간 원자력발전소 가동에 성공하며 '원자력 평화적 이용'의 대변자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유럽에서는 영국이 미국보다 1년 앞선 1956년 칼더홀 원자로를 가동했습니다. 프랑스(시농, 1963년), 독일, 스페인, 스웨덴, 이탈리아, 벨기에, 스위스 등에서 다양한 기술이 시험되었습니다. 특히 프랑스는 원자력청(CEA)이 개발한 천연우라늄 흑연가스로(이른바 'UNGG')를 통해 원자력을 에너지 의존도를 낮추는 장기 산업 프로젝트로 삼았습니다.

1960년대 대부분의 선진국이 원전 건설을 구상했지만, 실제로 미국 기술을 기반으로 민간 원자력 개발 계획을 본격 추진한 국가는 스페인, 프랑스 등 소수에 그쳤습니다. 원자로 상류에서는 우라늄 공급이 전략적 쟁점으로 떠올랐고, 하류에서는 방사성 폐기물이 이 에너지가 남기는 초장기 오염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핵을 둘러싼 질문

수십 년간의 시위 역사에 뿌리를 둔 반핵 운동은 1970년대에 세력을 키웠고, 1977년 7월 슈퍼페닉스 증식로 건설 반대 시위에서 정점에 달했습니다. 운동의 형태는 평화적 시위에서부터 프랑스 페센하임과 크레이스말빌, 스페인 레모니즈에서 벌어진 과격한 충돌까지 다양했습니다. 일부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은 서구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를 좌우할 정치적 무게를 갖추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1979년 쓰리마일섬, 1986년 체르노빌, 2011년 후쿠시마 사고를 거치며 원자력 산업의 안전 기준은 강화되고 독립 규제기관이 설립되었으며, 원전 전면 중단(이탈리아의 모라토리엄)이나 감축(독일의 탈원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다시 힘을 얻었습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1957), OECD 원자력기구(NEA, 1958), 세계원자력운영자협회(WANO, 1989) 등 국제기구들은 오늘날 지정학적 쟁점과 산업적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동시에, 시민들의 불안을 달래는 역할도 함께 맡고 있습니다.

더 읽을거리

- 폴 뢰스(Paul Reuss), 『원자력의 서사시: 과학·산업사』, EDP Sciences, 2007.

- 세드릭 르반도프스키(Cédric Lewandowski), 『핵에너지(Le Nucléaire)』, '내가 아는 것(Que sais-je)',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