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R.R. 마틴은 『얼음과 불의 노래』에서 모든 정형을 깨뜨리는 인물을 탄생시켰습니다. 바로 영주의 신하이자 천재적인 정치가인 티리온 래니스터입니다. 몸은 왜소해도 타고난 귀족으로, 교황하고 냉소적이며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죠. 작가 본인도 이런 인물이 현실 세계에 존재할 가능성은 처음부터 배제했을 겁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렇게 '커다란 존재감을 지닌 난쟁이'들이 살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폴란드에서만 말이죠.
난쟁이들은 태고의 시대부터 통치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피그미, 반쪽 사람, 어린아이, 혹은 기형아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이미 고대 이집트에서는 광대 역할을 맡았고, 샤를마뉴 대제 역시 자신만의 피그미를 거느렸다고 전해집니다. 특히 르네상스 시대에 그들의 인기는 절정에 달했습니다. 프랑스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아예 순종마를 번식시키듯 난쟁이들을 '사육'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의사와 주변 사람들이 감탄할 '괴물'을 만들어내기 위해 난쟁이들을 한 쌍씩 짝지어 줬다며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시대와 지역을 불문하고, 난쟁이들은 어디서나 호기심의 대상, 괴물, 자연의 돌연변이로 취급받는다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괴물 목장
이런 역할로 폴란드에도 난쟁이들이 들어왔습니다. 비스와 강 유역에서 난쟁이 소식이 처음 전해지는 것은 카지미에시 4세 야기에워치크 시대지만, 실제로 자신만의 피그미를 거느린 것은 얀 올브라흐트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의 동생 알렉산데르는 이미 궁정에 두 명의 난쟁이를 두었고, '작은 사람들'에 대한 진짜 관심의 물결은 보나 스포르차와 함께 폴란드를 덮쳤습니다. 이탈리아 출신 왕비는 난쟁이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의 시작점이기도 했습니다.

근세 시대에 남겨진 난쟁이 초상화 대부분은 스페인에서 나온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폴란드에서는 미술 분야에서 비슷한 유행이 정착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도시에츠카나 야그니에슈카의 모습은 오늘날 상상으로만 그려볼 수 있습니다.
난쟁이들은 계속해서 광대이자 궁정 오락의 제공자 역할을 맡았습니다. 또한 값비싼 선물이 되기도 했습니다. 보나는 하프스부르크 황제에게 한 쌍의 난쟁이를 선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 이 왜소한 사람들은 정치 게임 한복판에 뛰어들었으니까요.
보나는 자신이 신뢰하는 난쟁이들을 국가적 중요성을 지닌 회의에 데리고 갔습니다. 심지어 일대일 비밀 회담에도 참여시켰는데, 여왕의 대화 상대들이 난쟁이를 인간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입니다. 바르바라 라지비우우나의 죽음 이후 처음으로 아들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와 나눈 가장 어려운 대화 자리에도 군주의 작은 총애 인물이 곁에 있었다는 사실이 전해집니다. 보나는 그 자리에서 젊은 국왕에게 폴란드를 떠나고 싶다는 속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이 글은 카밀 야니키의 저서 『황금기의 귀부인들』(호라이즌 라벨, 2014)과 연계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최고의 경호원
또 다른 경우에는 난쟁이가 보나의 목숨을 구해내기도 했습니다. 1544년 밤, 가면을 쓴 암살자가 피오트르쿠프 근교에 있는 그녀의 사냥용 별장에 뛰어들었습니다. 무기를 뽑아 들고 결정타를 준비하던 그는 창가에서 잠들어 있던 난쟁이에게 걸려 넘어지면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소란에 가족들이 깨어났고, 암살자는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보나의 딸 카타지나는 총애하는 여성 난쟁이 도시에츠카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공주와 함께 스톡홀름의 감옥에서 수년을 보냈으며, 거의 그녀의 대신(大臣)격인 존재였습니다. 동시에 학식 있고 교활한 여인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의 최고위 정치인들과 직접 서신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녀의 설득력 있는 편지들이 오늘날까지 전해집니다. 도시에츠카가 카타지나를 죽음이나 왕위 상실의 위기로부터 구했을 것이라는 사실도 알려져 있습니다. 얀 3세 바사의 권력 경쟁자 에리크 14세 바사가 쇠창살을 톱질해 감시를 피해 탈출하려 한 것을 알아챈 것이 바로 그녀였습니다.

보나 스포르차. 폴란드 궁정 난쟁이 유행의 선구자.
문장(紋章)을 가진 난쟁이
여성 난쟁이 야그니에슈카는 보나의 둘째 딸 조피아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헨리크와의 결혼 후 독일로 떠날 때 함께 데려갔습니다. 역사가 율리안 바르토셰비치는 도시에츠카와 달리 이 피그미는 "악랄하고 독한 존재"로 여겨졌다고 주장했습니다. 사실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이 눈에 띄지 않는 난쟁이는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보나의 셋째 딸 안나 야기에워눙카는 편지에서 이를 직접 언급했습니다. 왕조의 일원들이 난쟁이 앞에서 떨었다는 사실만큼 공화국에서 난쟁이들이 차지한 높은 지위를 보여주는 증거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마지막으로 폴란드 출신 난쟁이는 헨리크 발레지에게 고용되기도 했습니다. 얀 크라소프스키라는 인물은 프랑스인이 왕으로 선출되는 데 일조했고, 악명 높은 크라쿠프 탈출 때도 그를 도왔습니다. 흥미롭게도 그는 스스로를 귀족, 심지어 성주(城主)의 아이라고 여겼습니다.

믿음직한 난쟁이가 없었다면 헨리크 발레지는 폴란드에서 제 할 일을 해내지 못했을 겁니다.
폴란드에는 귀족 문장을 가진 다른 난쟁이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궁정에서 활발히 활동했고, 자신만의 하녀와 하인을 거느리기도 했습니다. 유럽에서 가장 민주적인 나라에서 그들은 키와 무관하게 당당한 사람으로 대우받을 수 있었습니다.
출처
르네상스 여성들의 미모와 폴란드가 가장 크게 빛나던 시대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카밀 야니키의 책 『황금기의 귀부인들』(즈나크 호라이즌, 2014)을 읽어보세요. 이 글은 저자가 책 집필 과정에서 수집한 문헌과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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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의 다른 버전은 『뉴스위크 히스토리아』(2014년 12월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