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왕실 사생아,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역사를 통틀어 각국 군주들은 아내를 배신하는 일이 너무나 잦았고, 사생아를 두는 것은 일종의 관례처럼 여겨졌습니다. 오히려 드문 예외는… 사생아가 없는 경우였습니다. 그렇다면 왕실의 사생아들은 어떤 운명을 살았을까요?
왕족이나 하급 왕실 구성원 사이에서 혼외자식이 태어나는 일은 크게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1886~1941)의 어머니인 마리아 크리스티나 왕태후는 자신이 손주의 정확한 수조차 모른다고 인정할 정도였습니다. 또한 빅토리아 여왕의 매부로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을 다스리던 에른스트 2세 공작은 귀족 여성부터 평민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애인을 두어서, 그의 수도에서 마주치는 거의 모든 아이가 그의 자식일 가능성이 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사생아를 낳은 아들들의 행동에 대해 부모들이 별다른 불쾌함을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헤센 공작 알렉산더와 폴란드 백작부인 율리아 하우케의 아들인 루트비히 바텐베르크 왕자(1854~1921)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선원 왕자와 배우의 비밀 스캔들
루트비히는 독일 다름슈타트 근교 유겐하임 영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십 대에 접어들자 그는 선원이 되는 꿈을 키웠지만, 고향 헤센은 바다와 닿아 있지 않아 함대도 없었습니다. 유일한 선택지는 해외에서 복무하는 것이었고, 14세의 루트비히는 빅토리아 여왕의 딸 앨리스 공주의 후원 덕분에 영국 해군에 입대하게 됩니다.
런던에서 그는 반갑게 맞이받았습니다. 여왕과 그녀의 아들 웨일스 공 에드워드의 단골 손님이었던 그는 복무에 헌신했고, 잘생기고 우아한 매력으로 여성들의 주목을 끌어 말 그대로 모든 항구마다 연인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1879년, 런던에 오래 머무는 동안 그는 '저지 릴리'라는 별명으로 불린 미모의 배우이자 당대 최고의 명사 릴리 랭트리와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녀는 기혼자였지만, 이는 다른 남성과의 로맨스를 즐기는 데 아무런 방해가 되지 못했습니다. 1877년에는 루트비히의 숙부인 웨일스 공 에드워드조차 그녀의 연인 중 한 명이었습니다.

잘생기고 우아했던 루트비히는 어디서나 여성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바텐베르크와 배우는 수개월간 함께한 뒤, 랭트리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알리며 상황이 급변합니다. 루트비히는 부모에게 애인의 임신 소식을 전했고, 알렉산더와 율리아는 즉시 런던으로 사절을 파견했습니다. 결국 일은 은폐되었습니다. 거액의 현금을 대가로 랭트리 부인은 이 로맨스와 그 결과물에 대해 평생 침묵하고, 루트비히와 다시는 연락하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1878년 릴리는 딸 잔 마리를 낳았고, 그녀의 남편은 이 아이를 자신의 자식으로 여겼습니다. 루트비히의 평판은 흠집 하나 없이 유지되었고, 6년 뒤에는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인 헤센의 빅토리아 공주와 결혼까지 이루었습니다. 잔 마리가 자신의 친생부가 누구인지 알게 된 것은 20세가 되어서였습니다. 한 번 혼외자식으로 태어난 것에 불만을 토로하자, 어머니는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네가 해군에서 가장 잘생긴 장교 중 한 명의 딸로 태어난 게 다행이지, 한 푼도 없는 술꾼 아일랜드인의 딸인 것보다는 나으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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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많았던 로마노프 가문
아홉 명의 자식을 둔 아버지였던 러시아 차르 파벨 1세는 안나 로푸히나 공주와 불륜을 저질러 딸을 얻었지만(아이는 곧 요절했습니다). 그의 아들 알렉산드르 1세 역시 오랜 애인 마리아 나리시키나(본성 스비아토폴크체트베르틴스카야)를 두었고, 그녀는 여러 명의 자식을 낳았으며 그녀의 공식적인 남편이 이를 자신의 자식으로 인정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알렉산드르 1세와 마리아의 딸 소피아는 종종 친생부의 저택을 방문했는데, 황후 엘리자베타는 그녀를 언제나 반갑게 맞아주었다고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은 알렉산드르 2세였습니다. 그는 예카테리나 돌고루카와 불륜을 시작해 네 명의 자식을 낳았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자신의 거처로 불러들여 병든 아내의 방 바로 위층에 머물게 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로마노프 가문의 사생아들은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예외는 대공 콘스탄틴과 배우 요제피나 프리드리히스 사이에서 태어난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콘스탄티노비치였습니다.

파벨 1세의 가족.
1808년 그가 태어날 당시 아버지 콘스탄틴은 결혼한 상태였습니다(비록 아내 안나 페도로브나와는 이미 7년째 별거 중이었지만요). 콘스탄틴은 아들에게 성을 물려줄 수 없었지만, 부칭인 '콘스탄티노비치'를 주었습니다. 형식적으로 파벨은 왕조의 일원이 아니었지만, 로마노프 가문은 그를 가족처럼 대해주었습니다. 콘스탄틴의 형 알렉산드르 1세는 그의 대부가 되기까지 했고, 파벨의 결혼식은 겨울 궁전에서 거행되었으며 아버지 쪽 친척 모두가 참석했습니다.
파벨은 포병 장교가 되었지만, 그의 마음은 무인의 길보다 과학 연구에 더 깊이 끌렸습니다. 그의 연구 성과는 소련이 오랫동안 활용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소련의 대승전에 기여한 유명한 로켓포 '카튜샤'의 개발에도 그의 연구가 응용되었습니다. 물론 이 무기의 개념을 누가 처음 구상했는지 공식적으로 밝혀진 적은 없습니다.
오늘날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존재하며, 달 뒷면의 분화구 하나조차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습니다.
과거 시대의 왕실 사생아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더 알아보세요.
결혼의 기회를 잃은 덴마크 공주
남성의 추문이 널리 용인되던 시절, 젊은 귀족 여성들은 적합한 혼처를 찾기 위해 흠 없는 평판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9세의 딸 티라 공주(1853~1933)는 이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17세의 소녀는 왕족의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청년과 서로 사랑에 빠졌습니다. 상대는 기병 장교 빌헬름 프리만 마르셰르였습니다.
두 사람의 감정은 너무나 뜨거웠고, 티라는 곧 임신하게 됩니다. 크리스티안 9세와 왕비 루이제는 충격에 빠졌습니다. 딸의 '부도덕한' 행동을 숨기기 위해 부모는 그녀를 아들 게오르기오스 1세가 다스리던 그리스로 보내기로 결정했고, 공식적인 출국 사유는 공주가 앓고 있다고 알려진 '황달'이었습니다. 그리스의 따뜻한 기후가 회복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명분이었죠. 그러나 실제 목적은 티라가 궁전의 은밀한 곳에서 출산하고 아이를 입양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한 티라 공주의 모습.
1871년 그녀는 딸을 낳았지만, 아이는 출산 직후 그녀의 품에서 떼어졌습니다. 소녀는 덴마크의 요르겐센 가문이 거두어 '케이트'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한편 그리스에 머무는 동안, 티라의 연인 빌헬름은 연인을 잊으라고 명령한 크리스티안 9세와의 면담 끝에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덴마크 왕실은 비밀을 감추기 위해 애썼지만, 곧 유럽 각국 궁정에 티라의 사생아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갔고, 이는 그녀의 혼사 가능성을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 국왕의 딸이자 왕의 자매로서 군주나 왕위 계승자와의 결혼도 충분히 기대할 수 있는 신분이었지만, 세월이 흘러도 그녀에게 결혼을 청한 유일한 남자는 하노버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공자뿐이었습니다. 그는 왕위도 자신의 나라도 없이 오스트리아에서 망명 생활을 이어가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티라는 청혼을 받아들였고,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행복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사생아의 존재는 겨우 십여 년 전(!)에야 공식적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참고 자료
- Hough, R. Louis and Victoria. London, 1974.
- Skott, St. Romanovs: Yesterday and Today. Warsaw, 1994.
- Wiernicka, V. Secrets of the Russian Tsars. Łódź, 2018.
- Боханов А. Н. Мария Федоровна. М.: Вече,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