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히틀러와 조카 겔리 라우발, 근친상간설의 진실은?

1931년 아돌프 히틀러의 조카 겔리 라우발이 자살했을 때, 훗날 독재자가 될 인물은 일주일 동안 집에만 틀어박혔습니다. 독일 전역에는 온갖 소문이 난무했습니다. 조카가 외숙부의 아이를 임신했다거나, 히틀러가 직접 살해를 명령했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았죠. 과연 진실은 무엇이었을까요? 두 사람 사이에 실제로 근친상간적 유대가 있었던 걸까요?

앙겔라 "겔리" 라우발(Angela "Geli" Raubal)은 1908년 오스트리아 린츠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레오 라우발(Leo Raubal)과 히틀러의 이복 누나 앙겔라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자녀였습니다. 겔리는 1920년대 초 처음 외숙부를 만났고, 1927년 뮌헨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게 된 이후로는 정기적으로 그를 찾아다녔습니다.

2년 후 그녀는 학업을 접고 성악가의 꿈을 좇기로 결심합니다. 곧이어 히틀러가 프린츠레겐텐플라츠에 마련한 아파트의 빈방으로 들어가 함께 살게 되었고, 어머니 앙겔라는 오버잘츠베르크에 있는 남동생의 저택 가정부로 들어갔습니다. 21세의 젊은 여성에게 외숙부는 갈수록 큰 존재가 되어갔습니다.

비극으로 끝난 애매한 관계

두 사람의 관계는 비밀에 부쳐지지 않았으며, 수많은 소문과 달리 순전히 가족 간의 정에 기반한 플라토닉한 관계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겔리는 히틀러를 "알프 삼촌(Uncle Alf)"이라 불렀고, 그의 측근 서클에서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문화 행사는 물론 정치 행사에도 정기적으로 동행했는데, 1927년 뉘른베르크 당대회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외숙부와 조카의 유대는 겔리가 히틀러의 운전기사 에밀 모리스(Emil Maurice)와 가까워지면서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장래의 독재자는 보호 대상인 조카에게 지나치게 보호적이고 전제적으로 변해갔습니다. 그는 조카가 학업에 집중할 것을 강요했고, 결국 모리스를 해고하고 만니다.

히틀러와 조카 겔리 라우발, 근친상간설의 진실은?

조카가 세상을 떠난 후 히틀러는 그녀의 흉상 제작을 의뢰했고, 이를 뮌헨 아파트의 눈에 잘 띄는 자리에 두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때부터 밝고 쾌활하던 소녀는 점점 우울해지며 자신에게 닫혀들었습니다. 그녀는 성악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빈으로 가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청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1931년 9월 18일 오후, 겔리 라우발은 히틀러의 뮌헨 아파트에서 권총으로 스스로 생을 끝냈습니다. 부검 결과 그녀는 심장을 겨눴지만 폐에 맞았고, 결국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질식사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유서를 남기지 않아 그녀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는 지금까지도 미궁 속에 있습니다. 나이는 23세였습니다.

이 비보를 뉘른베르크에서 접한 히틀러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급히 뮌헨으로 돌아왔지만(그 과정에서 과속 딱지를 받기도 했습니다) 5일 뒤 빈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근친상간 혐의에는 진실이 있을까?

곧이어 그의 조카와의 관계와 그녀의 죽음의 정황은 나치의 정적들이 퍼뜨린 선정적인 소문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타블로이드들은 NSDAP(나치당) 당수가 근친상간 관계를 맺은 매조피증 환자이며, 조카가 임신 중이었거나 외숙부의 명령으로 살해당했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터무니없는 설들을 뒷받침하는 신빙성 있는 증거는 없습니다.

히틀러와 조카 겔리 라우발, 근친상간설의 진실은?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즈나크 호리존트(Znak Horyzont) 출판사에서 펴낸 로저 무어하우스(Roger Moorhouse)의 저서 『100개의 물건으로 보는 제3제국(The Third Reich in 100 Objects)』의 한 구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930년대 초 치열한 정치 공방 속에서 겔리의 자살은 나치가 이미지 타격을 줄이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이게 만든 사건이었습니다. 히틀러는 공식적으로 소문을 부인하고 언론에 정정보도를 요구했습니다. 문란한 도덕성을 지닌 변태이자 정치적 극단주의자로 신문에서 비난받던 정치인은 추종자들에 의해 덕망 있는 인물, 교양 있는 미학자, 장래의 국가원수로 재포장되었습니다.

히틀러 자신은 애타게 슬퍼하며 오버잘츠베르크의 하우스 바헨펠트(Haus Wachenfeld)에 있는 조카의 방에 일주일간 틀어박혔고, 자살까지 생각했다고 전해집니다. 정신적 균형을 되찾은 그는 겔리가 쓰던 두 개의 침실을 그대로 보존해 고인을 기리는 성소(聖所)로 만들라고 명령했습니다. 또한 곁에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그의 앞에서 절대 그녀의 이름을 언급하지 말라고 일렀습니다.

장래의 독재자와 조카 사이 관계의 실체를 우리는 영영 알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분명 남다른 유대가 있었던 것만은 확실해 보입니다. 고인을 위한 성소를 만들고 흉상 제작을 의뢰한 것은, 훗날 아내가 되는 에바 브라운(Eva Braun)에게조차 거의 보여주지 않았던 헌신의 증거입니다. 퓌러의 동시대인들이 겔리를 그의 '유일한 사랑'이라 불렀던 것도 어쩌면 틀린 말이 아니었는지도 모릅니다.

출처

위 글은 로저 무어하우스의 저서 『100개의 물건으로 보는 제3제국』(즈나크 호리존트 출판)에 실린 내용을 바탕으로 합니다.

제목, 사진, 굵은 글씨, 소제목 등은 편집진이 추가한 것이며, 원문은 가독성을 위해 단락 구분을 늘리는 등 기본적인 편집을 거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