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실패했는데도 '북극점 정복자'가 된 남자, 세도프의 북극 탐험

숨 죽이며 지켜본 극지 탐험의 운명

1912년부터 1914년까지 러시아 사람들은 자국민이 이끄는 극지 탐험대의 운명을 숨 죽이며 지켜보았습니다. 그중 게오르기 야코블레비치 세도프(Georgy J. Sedov)가 이끄는 한 탐험대는 1913년 말 프란츠요제프랜드 인근에서 행방불명됩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처음부터 돌아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리한 결정

세도프는 1912년 4월 북극점 원정 계획을 발표했고, 출발 시기를 그해 6월로 잡았습니다. 베테랑 극지 탐험가들은 너무 짧은 준비 기간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세도프의 결심은 굳건했습니다.

그는 해양계에서 야심만만한 출세주의자로 여겨지는 인물이었습니다. 대중의 호감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은 훗날 드러납니다. 탐험대가 실종된 후 구조 작전 지휘를 맡으려던 해군 장교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명예와 인정에 굶주렸던 세도프는 로마노프 왕조 집권 300주년을 맞아 자신의 탐험을 차르 가문에 바치기로 했습니다. 니콜라이 2세에게 완벽한 선물이 되어 은혜와 포상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것이죠. 그러나 세도프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의욕을 현실적인 역량과 비교하지 않은 몽상가였습니다.

악화일로였던 시작

출항 직전 첫 번째 문제가 터졌습니다. 탐험선 '성 포카 순교자호(스뱌토이 무체니크 포카)'가 과적 상태였고, 항만 당국은 출항을 허가하지 않았습니다. 탐험대장은 손에 잡히는 대로 물품을 선창에서 던져 버렸고, 그중에는 취사용 난로와 무전기가 담긴 상자도 바다에 빠졌습니다.

그럼에도 탐험대는 8월 27일 마침내 북극 정복에 나섰지만, 몇 주 만에 노바야젬랴에서 얼음에 갇혀 온 겨울을 보내야 했습니다. 얼음이 풀려 다시 항해를 시작한 뒤 1913년 8월에야 프란츠요제프랜드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또 1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번에는 석탄이 바닥났기 때문입니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부족한 지식을 채울 수 있었음에도 세도프는 러시아에서 구할 수 있는 최신 북극 연구 문헌을 읽지 않았습니다. 그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땅에 캠프를 설치하고, 빈약한 장비만으로 북극점(다행히 이곳은 실존했습니다)으로 이동하겠다고 계획했습니다.

게다가 세도프는 괴혈병에 걸리기 시작했고, 일부 승무원들은 그가 정신마저 혼미해진다고 의심했습니다. 1914년 2월 15일, 세도프를 필두로 한 3인 원정대가 배를 떠나 북극점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한 달 조금 지난 3월 19일, 탐험대장 없이 두 명의 대원만이 배로 돌아왔습니다.

원정대가 이동한 거리는 겨우 100km였습니다. 북극점까지는 2,000km나 더 남아 있었으니 말하자면 완전한 참패였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의 관련 문헌을 읽으면 전혀 다른 인상을 받게 됩니다.

'화려한' 성공?

세도프의 원정은 위에서 내려오는 공식 평가에 따라 놀라운 위업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세도프 자신이 사실상 유일한 북극 탐험가로 여겨지기까지 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쇄빙선, 두 개의 만, 노바야젬랴의 한 봉우리, 바렌츠해의 한 섬, 프란츠요제프랜드의 곶, 그가 태어난 후토르(마을), 심지어 빙하에까지 붙여졌습니다. '북방 땅의 개척 탐험가'는 어느새 '북극점 정복자'로 불렸습니다.

그리고 위대한 극지 탐험가의 또 한 컷… 석탄을 챙기는 것을 잊었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것이 최고 당국이 승인한 공식 서사였고, 이에 반대하는 것은 결코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1930년대 소련은 영웅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중에는 세도프도 있었습니다.

그의 귀족 출신은 잊혔고, 그는 '인민의 아들'로 재탄생했습니다. 이념에 맞춰 역사를 조정하는 과정에서 니콜라이 2세의 후원 역시 '잊혀졌습니다'. 그렇게 소련의 모든 학생은 북극점 정복자이자 북방 땅의 발견자 세도프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는 프란츠요제프랜드조차 전부 통과하지 못한 인물이었음에도 말입니다!

출처

  • W. D. 도첸코, 『러시아 함대의 비밀』, 모스크바,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