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9월 17일 이후 소련이 소위 '동부 변경지대(Kresy)'에서 벌인 소위 '청소 작업'은 동쪽으로의 강제 이주와 폴란드인에 대한 탄압과 연결 지어 기억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 리비우는 제2차 폴란드 공화국 영토 안에서 폴란드 과학과 문화가 명맥을 이어간 유일한 중심지였다. 학교와 대학, 극장이 운영되었고 언론도 폴란드어로 발행되었다.
소련은 구 제2차 폴란드 공화국 동부 영토 주민들에게 두 갈래 정책을 펼쳤다. 적으로 간주하는 이들은 중립화하고, 나머지는 회유하려 한 것이다. 최대의 적은 전직 관료, 장교, 경찰, 폴란드 국가의 정치인들이었으며, '계급 적'의 범주에는 기업가, 부유한 도시민, 변호사도 포함되었다. 소련 통치의 상수였던 테러와 탄압은 소련군 진입 직후 체포, 때로는 살인으로 시작되었고, 곧이어 NKVD가 뒤따랐다. 가장 대규모의 탄압은 폴란드 시민들을 시베리아와 카자흐스탄 등 소련 동부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킨 것으로, 그 규모는 32만 5천 명에서 무려 80만 명에 달했다.

1905년 엽서에 담긴 리비우 시립 극장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않는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사도 바울의 말을 즐겨 인용했다. 소련 국가에서 일자리는 국가가 제공했고, 고용은 (매우 낮은) 급여뿐 아니라 식량 배급, 주거권, '사회 기생충' 낙인에서 벗어날 가능성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즉, 생존하려면 일자리가 필요했다. 소련 당국은 이러한 논리를 앞세워 지식인 계층마저 회유하려 했다.
학교와 대학이 개설되었고, 가르칠 사람이 필요했다. 전쟁 전 교수들을 포섭하는 것이 동쪽에서 온 이주민들에게 이 역할을 맡기는 것보다 당국에 훨씬 큰 정당성을 부여했다. 폴란드 지식인 회유에 나선 공산주의자들은 놀랄 만큼 정교하고 은밀한 접근을 시도했다.
가장 중요한 것: 생존, 그리고 민족으로서의 생존
리비우 사람들은 봄이 오면 연합군의 공세가 시작되어 독일 점령은 물론 소련 점령마저 끝날 것이라 믿었다. 거의 확실해 보였고, 봄만 기다리면 되었다. 한편 독일 점령 지역에서는 대량 총살, 야기엘로니아 대학 교수들의 체포, 폴란드 문화 파괴라는 끔찍한 소식이 끊임없이 흘러들어 왔다. '소련 치하'의 현실은 조금 달랐지만 역시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대학은 소련화의 물결에 휩쓸렸고, 특히 동쪽에서 온 신참들로 자리를 채우고 레닌주의, 스탈린주의 등 새 학과를 신설하는 일이 두드러졌다.
그럼에도 리비우는 폴란드인 교육의 월경지였다. 9천 명의 학생 가운데 우크라이나인이 가장 많았지만 그다음은 폴란드인이었고, 일부 학과에서는 폴란드인이 우세하기까지 했다. 리비우 지역에는 폴란드어를 수업 언어로 삼는 초등학교가 314개 있었고, 우크라이나어 학교는 천 곳이 넘었다. 유대인 학교는 20곳이 남아 있었다. 리비우 시내에서만 7개 중등학교에서 폴란드어로 수업이 이루어졌다.
유일하게 남은 폴란드 문화의 중심지
소련 점령자의 갖가지 제약, 탄압, 이데올로기 세뇌에도 불구하고, 당시 리비우는 사실상 제2차 폴란드 공화국 영토 안에서 폴란드 문화와 과학이 숨 쉬던 유일한 중심지였다. 대부분의 변경 지역과 달리 폴란드 지식 엘리트가 리비우에 남아 있었고, 폴란드 교수들과 작가들이 현지 대학에서 강의를 이어갔다.

브와디스와프 타데우시 비스워츠키 — 폴란드의 슬라브학자, 사서, 서지학자, 오솔리네움 국립연구원 큐레이터 겸 관장
오솔리네움(Ossolineum)은 소련군이 리비우에 입성한 다음 날부터 운영을 재개했다. 임시 운영진은 미에치스와프 겐바로비치, 카지미에시 티슈코프스키, 브와디스와프 타데우시 비스워츠키가 맡았다. 연구원은 지주, 수도원, 개인 도서관의 소장 컬렉션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인수했다. 1939년 11월부터 기관장을 맡은 예지 보레이샤(공산주의 성향의 논설위원·작가·출판인·정치 활동가)는 오솔리네움을 축으로 폴란드학 연구 센터를 조성하고 폴란드 문학 연구소 설립을 추진했다. 보레이샤는 수많은 폴란드 학자들에게 연구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문화 창작자들의 처지는 체포가 시작되면서 급격히 악화되었다. 브와디스와프 브로니에프스키, 알렉산데르 바트, 테오도르 파르니츠키 등이 검거되었고, 에드바르트 두바노비치와 스타니스와프 글롬빈스키 교수는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당했다.
소련의 '해빙기'
1940년 하반기, 소련의 폴란드인 정책이 눈에 띄게 완화되었다. 스탈린 본인의 지시에 따라 폴란드인 포섭 공작이 벌어졌다. 폴란드어에 대한 대우가 나아졌고, 이전에 해고되었던 인사들이 다시 채용되었다. 다만 이 정책 변화는 학계, 예술 창작자, 언론인에 한정된 것이었다.
변화는 폴란드어로 발행되는 소련 일간지 '체르보니 스탕다르(Czerwony Sztandar, 붉은 깃발)'에서도 드러났다. 문화를 포함한 폴란드 관련 주제를 다루는 글이 실리기 시작했다. 1940년에는 리비우 국립 드라마 극장 레퍼토리에 '한여름 밤의 꿈'과 '크라코비아크인과 고랄인'이 올랐다. 리비우 학자 18명이 소련 당국의 초청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했으며, 전직 총리인 카지미에시 바르텔 교수는 별도의 일정으로 이 여행에 참여했다.

'붉은 깃발(체르보니 스탕다르)'
그 시기를 회고하는 다양한 기록들은 불확실한 내일, 체포와 강제 이주에 대한 공포가 얼마나 사람들을 짓눌렀는지 보여준다. 대학이나 극장에서 일하는 것이 어느 정도의 보호막이 되었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었다. 공포와 함께 폴란드 문화, 더 넓게는 폴란드성 전체에 대한 지적 의무감에서 비롯된 이른바 '협력'의 대가로, 이들은 값비싼 대금을 치러야 했다.
이 이야기에는 흑과 백이 없다. 공산주의 진영과 연줄이 있어 쉽게 '협력자' 낙인이 찍힐 수 있었던 앞서 언급한 보레이샤는 오솔리네움의 소장품을 지켜냈고, 폴란드 연구자들에게 피난처를 마련해 주었다. 한편 얀 코트는 반다 바실레프스카가 자신과 보이(Boy)를 비롯한 여러 사람을 강제 이주 열차에서 빼내 주었다고 회상했다. 그녀는 이렇게 수십 명의 문화·과학계 인사를 강제 이주의 비극에서 구해냈다.
미츠키에비치 사망 기념 행사, 모스크바 방문, 극장의 폴란드 레퍼토리, 리비우 대학의 폴란드 교수들과 학생들 — 이러한 일상은 체포와 강제 이주로 점철된 또 다른 삶과 병행하여 이어졌다. 그래서 '협력' 혐의는 빠르게 불거졌다. 이 비판은 종종 '잘레슈치체 길'을 따라 루마니아로 황급히 도피한 뒤 서방에서 안식처를 찾은 이른바 '불굴의 인사들'에 의해 제기되곤 했다. 저명 인사에 대한 고발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이들에게는 실질적인 보복의 기회이기도 했다. 협력 혐의를 그토록 열렬히 받았던 타데우시 보이-젤렌스키는 사실 민족주의-성직자 우파와 성직자들 자신이 가장 경계하던 이념적 적수 중 한 명이었다.
이 시기를 평가하는 일은 어렵다. 철저한 연구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렇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불굴'(때로는 사후(post factum)에 만들어진) 또한 폴란드 전통의 한 부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