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즐거움과 역사를 동시에 즐기는 휴일
가능하다면 즐거움과 문화를 결합한 것만큼 완벽한 휴일은 없습니다. 역사와 바다를 사랑하는 분들께 브린디시(Brindisi) 인근의 고색창연하고 매력적인 마을, 토레 산타 사비나(Torre Santa Sabina)가 흥미로운 여행지가 될 것입니다.
이 글은 이 아름다운 풀리아 지역 마을의 역사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사이트인 brindisimedievale.it을 설립하고 운영하는 피에를루이지 파파(Pierluigi Papa)가 '역사 한 알(Pills of History)'에 보낸 원고입니다.

토레 산타 사비나 찾아가는 길
브린디시와 풀리아의 주도를 연결하는 지방도에서 카로비뇨(Carovigno) 방면으로 갈라지는 도로를 따라가면, 브린디시 지역에서 널리 알려져 있고 여름철 많은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해수욕 명소인 토레 산타 사비나에 도착합니다.
차를 주차하고 나면 바, 펍, 아이스크림 가게, 레스토랑, 디스코펍, 노점과 놀이기구로 활기 넘치는 대로가 펼쳐집니다. 지평선 너머에는 바다로부터 오는 공격으로부터 이 지역을 방어했던 유명한 탑의 모습이 보입니다.
고대 항구의 흔적, 메삿피아 시대
1970년대 진행된 고고학 발굴 조사에 따르면, 토레 산타 사비나는 메삿피아(Messapia)¹ 시대에 고대 카르비나(Carbina, 현재의 카로비뇨)의 항구 정착지였습니다. 동방에서 도래한 선박들이 이곳에서 다른 메삿피아 도시들과 물품을 거래했는데, 그 도시로는 카일리아(Kaìlia, 첼리에 메사피카), 오라(Orra, 오리아), 브렌티온(Brention, 브린디시), 그나티아(Gnathia, 에냐치아), 스투르니움(Sturnium, 오스투니) 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발굴 과정에서 미케네 시대(기원전 1600년~기원전 1000년)부터 후기 고대에 이르기까지 약 8천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중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유물들도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고고학자들의 학설에 따르면, 토레 산타 사비나의 해수면 아래 분지는 선박이 정박하는 동안 깨진 도기를 버리거나 단순히 바다에 빠진 물품들이 쌓이는 일종의 항구 폐기장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놀라운 난파선 발견
고고학자들에게 가장 놀라운 발견은 3세기 말부터 4세기 초에 속할 가능성이 높은 난파선²의 절반이 확인된 것입니다. 출토된 도기의 보존 상태 덕분에 비교적 정확한 연대 추정이 가능했습니다.
비잔틴 시대와 성녀 사비나 숭배
비잔틴 지배 시기에는 주변 지역에 암석 동굴들이 많았으며, 산타 사비나라는 이름은 아마도 이 동굴에서 성녀에게 바쳐진 숭배 행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입니다.
튜턴 기사단과 탑의 역사
1226년 튜턴 기사단³은 십자군 전쟁에서 돌아온 부상자들을 돌보기 위해 병원을 설립했고 예배당도 함께 지었지만, 당시 탑의 존재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탑의 존재에 관한 최초의 증거는 라이몬도 발초 오르시니(Raimondo Balzo Orsini)⁴의 재산 목록에서 확인됩니다. 기록에 따르면 이 탑은 13세기에 이미 파괴된 상태였다고 합니다.
1557년의 중요한 문서에도 탑의 흔적이 나타나는데, 바리의 교회 건설에 카로비뇨 채석장의 돌이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석재 운송이 바다를 통해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1597년에는 소유주들이 탑을 왕실에 강제로 매각해야 했고, 이후 탑은 밀수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병사 부대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해적의 습격과 부르봉 왕조의 결정
1815년 11월 25일 밤부터 26일 사이 해적(corsairs) 무리의 야간 습격이 시도되었으나, 탑을 지키던 병사들이 위협을 성공적으로 제거했습니다.
1829년 남부 이탈리아는 부르봉(Bourbon) 왕조의 통치 하에 있었고, 해상 방어라는 원래의 목적을 상실한 해안 탑들을 민간에 매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이 탑을 구매하려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1915년, 탑의 재생
1915년 탑은 완전히 붕괴 직전의 상태였지만, 알프레도 덴티체 디 프라소(Alfredo Dentice di Frasso) 제독⁵이라는 구매자를 만나 레체(Lecce) 출신 엔지니어를 통해 복원 작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후 그의 후계자들은 탑을 현재의 소유주인 루소(Russo) 가문에게 매각했고, 루소 가문은 오늘날 우리가 보는 모습 그대로 탑을 보존하고 유지하기 위해 개보수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만약 마지막 두 소유주가 탑을 구매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우리는 완전한 폐허가 된 탑이나 어쩌면 흔적조차 남지 않은 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건축적으로 독특한 해안탑
산타 사비나 탑은 우젠토의 토레 산 조반니(Torre San Giovanni di Ugento, LE) 및 만두리아의 산 피에트로 인 베바냐(San Pietro in Bevagna di Manduria, TA)와 함께 풀리아 지역에서 드물게 팔각형 형태를 지닌 세 개의 해안탑 중 하나입니다.
이 탑의 또 다른 특징은 네 개의 늑골이 동서남북, 즉 사방위를 향해 있는 별 모양 구조라는 점이며, 구엘프식 총안(battlements)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화롯불로 연결된 경보망
이 탑은 오스투니의 토레 포젤레(Torre Pozzelle) 및 토레 구아체토(Torre Guaceto)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군인들은 바다에서 위험, 특히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본격화된 터키의 침입을 발견하면 작은 화롯불을 피워 올려 서로 경보를 전달하는 통신망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주석
¹ 철기 시대부터 기원전 272년 로마의 정복 때까지 남부 무르자(Murgia), 브린디시·레체 전역, 타란토 일부 지역을 차지했던 메삿피족의 점령기를 가리킵니다.
² 이 난파선은 외판, 즉 선체 껍데기가 남아 있습니다. 선체는 탭(tab)으로 용접된 판재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기에 수많은 늑골 프레임과 내부 선체의 일부 판재, 즉 선창 바닥이 고정되어 있습니다. 마스트 받침 홈이 있는 견고한 파라메찰레(paramezzale)도 아직 확인됩니다. 고고학자들은 이 배가 길이 20미터에 달하고 높은 배수량을 지녔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³ '예루살렘 성모 데이 튜토니치 호스피탈러 형제회'는 독일에서 온 순례자들을 돕기 위해 성지에서 창설된 수도 군사 수도회입니다. 그 기원은 1199년으로, 예루살렘 공방전에서 부상당한 독일 기사를 순례차 방문한 독일 상인들이 치료해 준 것이 계기가 되어, 이들은 순례자에 대한 접대와 구호에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예배당과 객실을 갖춘 병원을 설립했습니다. 튠토닉 기사단은 독일권과 발트 지역에서 크게 발전하여 수많은 코멘다(commenda)를 보유했습니다. 기사들은 검은 십자가가 가슴에 새겨진 흰색 로브로 식별되었습니다.
⁴ (노체라 인페리오레, 1361~타란토, 1406). 나폴리 왕국의 대장군(Grand Constable)이자 솔레토·비스칼리아·레체 백작, 베네벤토·바리 공작, 오트란토·나르도·우젠토·갈리폴리·오리아·오스투니·마티나 프란카·트리카제 영주, 타란토 공, 성 로마 교회의 기수관( Gonfaloniere )이었습니다.
⁵ 덴티체 디 프라소 가문은 산 비토 데이 노르마니 성과 카로비뇨 성 등 역사·문화적 가치를 지닌 여러 건축물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참고 문헌
R.W., 「토레 산타 사비나, (수몰된) 배들의 묘지에서 보내온 첫 사진」, 코리에레 델 메쪼지오르노, 2009년 10월 1일
안토넬라 리포(Antonella Lippo), 「아프리카산 레코모스를 실은 배 - 산타 사비나, 난파선의 바다 묘지」, 코리에레 델 메쪼지오르노, 2011년 1월 14일
참고 웹사이트
www.torresantasabina.it / 다큐멘터리 「테레 델 살렌토」(Terre del Salento), 텔레라마(TeleRama), 2011년 7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