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벨로 만의 아름다운 섬, 스피날롱가
스피날롱가 섬(공식 명칭은 칼리돈)은 그리스 크레타 섬 북동부, 풍경이 그림 같은 미라벨로 만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곳은 크레타 최고의 관광 명소 중 하나로 손꼽히지만, 그 명성의 이면에는 인간의 고통, 배제, 그리고 비참한 죽음에 얽힌 이야기가 숨겨져 있습니다.
베네치아 요새에서 오스만령까지
1579년 베네치아인들은 이 섬에 요새를 건설했는데, '정복 불가능'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견고했습니다. 1669년 오스만 제국이 크레타를 정복했을 때도 스피날롱가의 요새는 함락되지 않았고, 1715년까지 많은 크레타 주민들이 새로운 침략자를 피해 이곳을 피난처로 삼았습니다. 이후 섬은 마침내 오스만 제국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크레타의 격동의 역사와 독립을 향한 주민들의 끈질긴 저항은 결실을 맺어, 1898년 터키 통치로부터 해방되어 자치 지역이 되었습니다. 마지막 터키 주민들이 스피날롱가를 떠난 것은 1903년이었지만, 그들이 남긴 집과 거리는 오래 기다리지 않고 새 주인을 맞이하게 됩니다.

'불결한 자들의 병', 한센병의 역사
나병(한센병)은 오랫동안 죄에 대한 성경적 응보로 여겨졌습니다. 환자들은 사회의 버림받은 자로 취급되었고, 너덜너덜한 헝겊을 걸치고 얼굴을 가린 채, 특수한 딱딱거리는 도구를 흔들어 건강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접근을 알려야 했습니다.
특히 중세 시대 나병 환자들은 거의 모든 권리를 박탈당했습니다. 산 사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시체처럼 취급되어 가족에게서 떨어져 마을 변두리나 외딴 곳에서 고립된 생활을 강요당했으며, 유럽 곳곳에 세워진 나병원에 수용되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태도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군 전쟁 당시 나병이 십자군 사이에 퍼지면서 예루살렘 왕 발두인 4세조차 병에 걸리게 되었고, 이 무렵부터 고통받는 이들을 돕는 것이 기독교인의 의무로 간주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낙인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환자들이 폭넓은 지원을 받았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이 병은 여전히 광범위한 혐오와 공포의 대상이었고, 그 두려움은 20세기까지 유럽에 남아 있었습니다.
감염에 대한 두려움은 극에 달해, 여성과 잠재적인 자녀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남성 환자를 거세하는 경우까지 있었습니다.
나병에 대한 인식이 점진적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 노르웨이의 게르하르트 아르마우어 한센이 원인균인 마이코박테리움 레프라(Mycobacterium leprae)를 발견하면서부터입니다. 진정한 전환점은 1930년대 최초의 나병 치료제가 등장하면서 찾아왔고, 이는 유럽 내 감염원을 없애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환자들에게 이것이 병원이나 수용소를 빠져나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보장은 아니었습니다. 스피날롱가의 주민들이 뼈저리게 깨달은 사실입니다.

나병 환자들을 위한 '수용소'
1904년 10월, 스피날롱가의 집들에는 이미 251명의 크레타 나병 환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식처가 되어야 할 이곳은 오히려 감옥에 가까웠습니다.
섬은 경사가 가팔라 이동 자체가 쉽지 않았습니다. 가파른 거리와 수많은 계단은 이미 사지가 변형된 환자들에게는 넘을 수 없는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부 환자들은 섬 안쪽의 더 널찍한 집 대신 해안가의 좁고 열악한 건물에 살아야 했습니다. 서류 위에서만 그럴듯했던 계획은 이것뿐이 아니었습니다.
"이론상으로는 모든 것이 계획대로였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당국은 '환자들을 최선을 다해 수용했다'고 말하지만, 섬의 악명은 주변에 급속히 퍼지고 있었습니다. 스피날롱가에는 전기도, 상수도도 없었습니다. 베네치아 시절부터 사용된 오래된 저수지가 물을 공급했지만, 그곳에 고인 물은 더럽고 세균이 가득한 형편없는 질이었습니다."
"기본적인 약품, 진통제, 소독약조차 부족했습니다. 당시 기준으로 이것이 의학이 나병 환자에게 줄 수 있는 최소한이자 전부였습니다. 새로 입도하는 환자들은 보통 수갑이 채워진 채 크레타 경찰에 의해 섬으로 끌려왔습니다."

법적으로 환자들과 함께 섬에 거주해야 했던 의료진은 실제로는 육지에서 가끔 찾을 뿐이었습니다. 섬에 남은 유일한 건강한 사람들은 질서 유지를 위해 고용된 간수들, 즉 유죄 판결을 받은 수감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환자들을 착취하기 시작했습니다. 질이 의심스러운 음식을 터무니없이 비싼 값에 팔았고, 권력을 남용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주민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마침내 가해자들을 섬에서 축출하고 통행금지를 폐지하며, 수용소 안에서 가게와 카페를 열 수 있는 권리까지 쟁취해냈습니다.
1913년 크레타가 그리스 영토에 편입되면서 스피날롱가에는 전국 각지의 환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교육받고 부유한 아테네 시민들도 있었습니다. 덕분에 섬에서는 추가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물론 개선 과정은 고단했지만, 환자들은 일상의 대체물이라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이 모습은 외국 언론의 호평을 받지 못했습니다.
관광 명소가 된 금기의 역사
1937년 스피날롱가를 방문한 벨기에 기자는 이곳을 노골적으로 '수용소'라고 불렀습니다. 행복하게 사는 주민들, 평범한 일상, 결혼 이야기 같은 아름다운 서사 뒤에는 인간의 고통과 방임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섬에서 태어난 건강한 아기들은 검사를 거친 후 부모에게서 떼어졌습니다. 신분은 바뀌었고 아테네의 고아원으로 보내진 뒤 새 가정에 입양되었습니다. 많은 환자들은 오랫동안 상처를 스스로 돌보아야 했고, 섬에서 죽은 이들은 이름 없는 무덤에 묻혔습니다.
섬 자체도 환영받는 피난처는 아니었습니다. 땅은 크레타가 자랑하는 라시티 고원의 비옥한 토지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이탈리아와 독일의 점령기에 주민들은 굶주림으로 고통받아야 했습니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라 할 수 있는데, 적의 영토에 있던 다른 나병 수용소들에서는 환자 학살이 벌어지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끝나도 환자들은 자유를 얻지 못했습니다. 치료제가 이미 시중에 나와 있었음에도 스피날롱가를 떠나는 것이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회복된 환자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정부조차 방침을 정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증상이 가장 가벼운 일부만이 사회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환자들은 신체 변형과 실명으로 남은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결국 외부의 압력으로 1957년 섬의 나병 수용소는 폐쇄되었고, 일부 회복자들은 아기아 바르바라 병원으로 옮겨져 1970년대까지 작은 집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리고 그 집들의 건축 비용마저 그들 스스로 부담해야 했습니다.
오늘날 스피날롱가는 크레타 최고의 관광 명소 중 하나입니다. 매년 수많은 관광객이 찾지만, 그들에게 들려주는 것은 미화된 이야기뿐입니다. 빅토리아 히슬롭이 소설 '더 아일랜드(The Island)'를 집필한 영감도 이곳에서 왔으며, 이 소설은 그리스 미니시리즈의 원작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민들의 진짜 역사는 역사의 장에서 점차 흐릿해지고 있습니다. 제대로 된 기록이 부족하고 남겨진 글은 턱없이 적어, 이제 우리가 다시는 다가갈 수 없는 세계의 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