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8월 쿠데타, 소련의 마지막 도박
1991년 8월 19일, 소련 공산당 내 강경파 관료들은 국가의 해체를 막기 위해 권력 장악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구질서를 지키려던 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오히려 소련(USSR) 붕괴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쿠데타의 실패는 무엇보다 소련 수도의 거리로 쏟아져 나온 모스크바 시민들 덕분이었습니다. 시민들은 쿠데타 세력의 행보와 공산주의 독재로의 회귀에 대한 반대 의사를 분명히 드러낸 것입니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덕분에 자유의 달콤한 맛을 알게 된 이들은 다시는 철의 장막 뒤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쿠데타는 조용히 준비되고 있었다
54세의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선언한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은 빠르게 결실을 맺기 시작했습니다. 언론의 자유가 생겨났고, 나라의 과거사와 당면 문제에 대한 진실을 갈구하는 사람들이 신문 키오스크 앞에 길게 줄을 섰습니다. 시민들은 자신들의 시민권이 침해받고 있음을 깨달았고, '타락한 서방'처럼 살고 싶어 했습니다.
시민과 정치인들은 점점 더 공산당의 패권 철폐를 요구했습니다. 1989년에는 80년 만에 처음으로 자유선거를 통해 무소속 인사들이 소련 최고회의에 진출했습니다. 소련 의회에는 지역간 의원단과 같은 야권 계파도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모두에게 환영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르바초프 주변에도 보수파가 적지 않았고, 소련 지도자는 구질서 수호세력과 민주화 세력 사이에서 줄타기를 강요당했습니다. 발트 3국은 소련 탈퇴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혔습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던 페레스트로이카의 창시자조차, 국가와 시민 의식 안에서 일어난 변화의 폭에 놀랐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1990년 3월 소련 초대 대통령이 된 고르바초프에게는 1990년 말부터 보수파의 영향력이 점점 커졌습니다.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은 1990년 12월 21일 "다가오는 독재에 대한 항의"라며 사임했습니다. 1991년 1월 13일에는 소련 전차가 빌니우스 TV 타워를 공격해 건물을 지키던 14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같은 해 1월 29일, 고르바초프는 "공공 질서 유지"를 명분으로 군대 사용을 허용했습니다.
새로운 소련 연방, 마지막 희망
당시 사회 상황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발트 3국뿐 아니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역시 여론의 영향을 받아 모스크바로부터 더 큰 자치권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르바초프의 최대 정적 보리스 옐친은 높은 인기를 누렸고, 1991년 6월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습니다.
소련의 완전한 해체를 막기 위해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연방 조약을 재협상하기로 결정합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아제르바이잔 등 9개 공화국이 '주권 공화국 연합'이라 불릴 새 국가에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나머지 소련 구성국들도 추후 이 체제에 가입할 수 있었습니다. 예상대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는 참여를 거부했습니다.
새 국가의 구성원들은 공동 통화와 공동 무력을 유지하는 조건에서 모스크바로부터 더 큰 독립성을 누리게 됩니다. 고르바초프는 대통령직을 유지했습니다. 새 조약 서명일은 9개 공화국 지도자들이 모스크바에 모이는 1991년 8월 20일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새 연방 조약 협상을 마친 고르바초프는 부인 라이사, 딸 이리나, 사위 아나톨리와 두 손녀를 데리고 크림 포로스의 별장으로 휴가를 떠났습니다. 귀국 예정일은 8월 19일이었습니다…
쿠데타와 그 몰락
소련 권력 내 강경파는 조약 서명을 저지하고 더 이상의 개혁이 진행되지 못하도록 하기로 결심합니다. 이를 위해 이른바 '국가비상상태위원회(GKChP)'를 꾸렸습니다. 위원회는 발렌틴 파블로프 총리, 겐나디 야나예프 부통령, 드미트리 야조프 국방장관, KGB 의장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 내무장관 보리스 푸고 등 8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계획은 비상사태 선포와 미하일 고르바초프 축출이었습니다.
8월 18일, 위원회 인사들은 대통령을 찾아가 건강 문제로 국가원수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다며 사임을 권유했습니다. 고르바초프가 거부하자 음모자들은 대통령 감금을 명령했고, 포로스 별장의 전화선은 차단되었습니다.

저녁이 되자 모스크바 거리에서 시위가 시작되었습니다.
8월 19일 월요일 오전 3시 30분, KGB 의장은 부하들에게 "페레스트로이카는 끝났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오전 5시에는 모스크바 KGB 지부장이 상부로부터 서명된 백지 체포영장을 넘겨받았습니다. 쿠데타 세력은 정적과 언론인 등의 체포까지 계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전 6시, TV와 라디오로 생중계된 기자회견에서 겐나디 야나예프가 위원회를 대표해 나섰습니다. 그는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건강상의 이유로 헌법상 직무를 수행할 수 없으며, 그 기간에는 부통령이 직무를 대행한다고 밝혔습니다. 야나예프는 비상사태 선포를 알리고 시민들에게 "침착함을 유지"하며 새 정부의 결정에 따를 것을 촉구했습니다. 성명이 끝나자 한 젊은 기자가 위원회 멤버들에게 정곡을 찔렀습니다. "방금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걸 자각하고 있습니까?"
8월 19일 이른 아침, 쿠데타 세력은 정예 부대 여럿을 수도로 진입시켰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일부 부대의 지휘관들이 위원회의 명령에 복종하기를 거부했다는 사실입니다. 저녁에는 모스크바 거리 곳곳에서 시위가 번졌습니다. 반발한 시민들은 러시아 의사당 소재지인 백악관으로 향했고, 이곳은 반대 세력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시위대를 이끈 것은 보리스 옐친이었습니다. 백악관에는 위원회에 굴복하지 않은 의원들과 문화·군 분야 인사들이 모였습니다. 옐친에게 충성하는 전차 부대가 백악관을 에워싸고 반대파 정치인들을 방어할 준비를 했습니다. 어느 순간 옐친은 전차 위에 올라가 연설하며 쿠데타 세력의 행동을 "불법"이라고 규정했습니다.
8월 20일 저녁, 백악관의 사람들은 쿠데타 세력에 충성하는 부대가 8월 20~21일 밤사이 건물을 공격할 것이라는 소식을 접합니다. 모스크바 시민들은 의사당 주변에 바리케이드를 쌓았습니다. 옐친 대통령과 부통령 알렉산드르 루츠코이는 사람들에게 목숨을 걸고 진격하는 전차 바퀴 밑에 눕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대신 그들은 공격자들과 대화하며 양심에 호소하라고 조언했습니다. 그날 밤 실제로 공격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세 명의 젊은 모스크바 시민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8월 21일 아침이 되자 쿠데타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시민들의 저항과 위원회 멤버들의 우유부단함 덕분이었습니다. 저녁에는 쿠데타 관련자들에 대한 체포가 시작되었고, 그중 보리스 푸고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8월 21~22일 밤, 고르바초프와 가족은 모스크바로 돌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