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분열과 학살, 그리고 붕괴 — 크라쿠프 봉기는 성공할 수 있었을까?

농민과 귀족이 손잡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그 어느 때와도 다른 봉기가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봉기는 비극으로 변했고, 민중 자신이 반란의 말살자가 되고 말았다.

두 차례의 국민봉기 역사는 명확한 교훈을 남겼다. 승리는 오직 농민 대중의 폭넓은 지원을 얻었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회 개혁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Tadeusz Kościuszko)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코시치우슈코 봉기와 11월 봉기에서 얻은 경험은 밝지 못했다. 귀족 계급(적어도 그 지배적인 부분)은 농민의 삶을 개선하는 사소한 변화조차 받아들이느니, 차라리 나라의 몰락을 택했던 것이다. 1831년 러시아군이 바르샤바로 진격했을 때도 의회(세임)는 그런 양보에 끝내 동의하지 않았다.

11월 봉기 실패 후 비밀결사 운동은 당시 가장 큰 자유가 존재하던 갈리치아로 옮겨갔다. 또 한 번의 국민적 봉기를 준비하려는 의도였다. 그래서 가장 활발한 움직임은 크라쿠프 공화국에서 일어났다. 1835년에는 개혁 구호를 내걸고 '폴란드 인민 협회(Związek Ludu Polskiego)'가 설립되었다. 에드바르트 뎀보프스키(Edward Dembowski)도 그 활동가 중 한 사람이었으며, 그는 훗날 크라쿠프 봉기를 조직한 인물로, 봉기 발발 당시 겨우 24세였다.

뎀보프스키 같은 활동가들은 독립 요구와 사회 개혁 요구를 하나로 묶었다. 그들은 기존 봉건 관계의 철폐, 농노제 폐지, 농민 해방, 민주적 통치의 도입을 요구했다.

귀족과 함께가 아니라, 영주에게 맞서야 한다!

음모자들은 심각할 정도로 비현실적이었다. 당시 상황에서 농민 대중을 끌어들일 가능성은 사실상 제로였고, 귀족들의 참여도 미미했다. 갈리치아의 마을에서는 불의에 대한 감정, 귀족에 대한 분노, 신체적·경제적 폭력과 예속, 굴욕에 대한 복수심이 커져만 갔다. 농민에게 진짜 적은 '영주'였고, 보호자는 황제와 그의 행정부였다. 실제로 오스트리아는 폭력과 착취를 종식시켰지만, 개혁은 그리 깊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농민의 눈에는 오스트리아가 곧 그들의 수호자였다. 오스트리아는 이 카드를 능숙하게 폴란드 귀족에 맞춰 사용했다. 이런 여건에서 농민들이 미워하는 귀족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은인'에게 무기를 겨눌 것이라는 기대는 순전한 망상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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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6년 2월 봉기 첫날, 소규모 부대들이 오스트리아의 방어가 약한 초소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봉기군의 전력은 너무나 빈약해서 오스트리아 측은 진압에 큰 노력을 들일 필요조차 없었다.

분열과 학살, 그리고 붕괴 — 크라쿠프 봉기는 성공할 수 있었을까?

크라쿠프 봉기 시대의 독수리 문장

설상가상으로 농민들이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가 퍼뜨린 '귀족들이 봉기를 준비한다'는 소문에 겁먹은 농민들은 이 '재난'을 막겠다며 대거 일어섰다. 그들은 봉기군의 소규모 부대를 습격하고 포로로 잡은 봉기군을 분할 점령국들에게 넘겼다.

동시에 주로 서갈리치아에서는 야쿠프 셸라(Jakub Szela)가 이끄는 농민들이 귀족 저택들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흔히 잔혹한 방식으로 약 1,000명을 살해했다. 이 사건은 '약탈(rabacja)', 즉 '갈리치아 학살'이라 불린다.

오스트리아가 봉기군을 구했다?

사태의 중심지는 크라쿠프였다. 약 6,000명의 봉기군이 동원되었으나 무장한 자는 2,000명에 불과했다. 당시 크라쿠프는 자유 도시, 즉 크라쿠프 공화국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2월 22일, 그곳에서 국민정부가 수립되고 '폴란드 국민에게 보내는 선언문'이 발표되었다.

봉기 최대의 비극은 전투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그두프(Gdów)에서 벌어졌다. 우선 봉기군은 비엘리치카(Wieliczka)를 점령하고 그 지역 병력을 380명으로 늘렸다. 무장은 창과 세워 든 낫 등이 전부였다. 2월 26일 그들은 그두프에 도착했다. 마을 근처에는 보병 500명과 기병 170명으로 구성된 오스트리아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폴란드 경비병들에게 향한 총격이 그들을 와해시켰다.

분열과 학살, 그리고 붕괴 — 크라쿠프 봉기는 성공할 수 있었을까?

뎀보프스키는 십자가를 들고 행렬을 이끌며 농민들에게 호소하려 했으나, 오스트리아군의 총탄에 쓰러졌다.

그두프에서 혼란에 빠진 나머지 봉기군은 오스트리아군을 향해 달려갔다. 공황이 번졌고 무질서한 후퇴가 시작되었다. 공동묘지 담벼락에 몰린 봉기군은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지만, 농민들이 그들을 추격해 붙잡았고, 잔혹하게 살해했다. 154명이 전사하고 59명이 포로로 잡혔다.

생존자들은 오스트리아 장교들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적측에서는 단 한 명도 다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군은 아무 저항 없이 크라쿠프를 점령했다. 그 전에 뎀보프스키는 십자가를 들고 행렬을 이끌며 농민들에게 말을 걸려 했지만, 오스트리아군의 총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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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이 이른 봉기

여러 차례 시도에도 불구하고 봉기는 다른 분할 지역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동갈리치아도 참여하지 않았다. 리비우(Lwów)에서는 프란치셰크 스몰카(Franciszek Smolka)가 반대 입장을 취했다. 그는 이미 갈리치아 애국 운동의 지도자로 부상하고 있었는데, 봉기가 국익에 해가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지역에서는 '갈리치아 학살'이라 불리는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크라쿠프는 자유 도시의 지위를 잃었지만, 오스트리아 편입이 오히려 도시의 발전을 가속화했다. 오스트리아는 농민 봉기를 진압한 뒤 1848년에 농노제를 폐지했다. 한편 이 봉기는 어쩌면 너무 이른 시작이었다. 단 2년 뒤, 유럽 전역을 휩쓰는 '민족의 봄(Spring of Nations)'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참고 문헌

  1. Adam Leszczyński, 『폴란드 인민사(People's History of Poland)』, 바르샤바, 2020.
  2. Bolesław Limanowski, 『1846년 폴란드 혁명 운동사』, www.rcin.org.p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