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프셰미슬 2세와 루드가르다, 어떤 사랑의 비극

1283년 12월, 루드가르다 공작부인의 급서 소식이 퍼지자 대폴란드 백성들은 곧바로 범인을 지목했습니다. 연대기 작가 얀 드우고시 역시 공작부인이 남편의 명령으로 살해당했다고 믿었습니다. 과연 프셰미슬 2세가 정말 이 일에 손을 썼을까요? 실상은 어땠을까요?


아버지를 잃고 태어난 왕자

1257년 초, 엘리자베타 공작부인은 임신 소식을 알렸지만, 프셰미슬 1세는 이 후손의 탄생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들은 같은 해 10월 14일, 아버지가 죽고 넉 달 만에 태어났습니다. 포즈난 대성당에서 보구흐와 주교가 세례를 집전하며 아버지의 이름을 따 슬라브어 이름 '프셰미슬'을 지어주었는데, 이는 "현명한", "지혜로운", "영리한"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완전히 독립된 국가였던 대폴란드에 대한 전권은 프셰미슬의 숙부 볼레스와프가 넘겨받았습니다. 어린 프셰미슈코는 그의 보호 아래 자랐고, 학식 있는 수도사들에게 교육받으며 기사의 기예를 익혀갔습니다.

행복하게 살았을까?

소년이 16세가 되자 숙부는 그의 결혼을 결정했습니다. 젊은 왕자는 슈체친으로 건너가 혼담 상대인 슈체친 공작의 손녀 루드가르다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그보다 두 살 어렸고, 왕자는 그 소녀에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간단히 서로를 알아본 뒤 현지에서 곧장 결혼식이 거행되었습니다.

당시에는 14세면 혼인에 무리가 없는 나이로 여겨졌습니다. 프셰미슬은 즉시 대폴란드로 돌아갔고, 루드가르다는 잠시 슈체친에 머물며 이주 준비를 했습니다. 그녀는 이후 궁정 일행과 함께 변경 도시 드제진코에 도착해 성대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부부는 볼레스와프, 그의 아내 욜렌타, 그리고 귀족들과 함께 일행을 이루어 포즈난으로 향했습니다. 특히 프셰미슬이 경건한 아버지처럼 금욕적인 기질을 보이지 않았던 만큼, 부부가 화목하고 행복한 관계를 이어갈 것처럼 보였습니다.

성년에 이른 왕자는 숙부에게 별도의 통치 영지인 포즈난 지역을 요구했고, 짧은 갈등 끝에 목적을 이루었습니다. 볼레스와프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온 주 전체가 장차 조카에게 넘어갈 것이 분명했습니다. 나머지 대폴란드를 물려받기까지 오래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1279년 4월, 볼레스와프는 열병 발작으로 쓰러졌습니다.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낀 그는 조카를 침상으로 불러 아내와 딸들을 부탁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감았습니다.

프셰미슬은 아마 이미 머릿속에 왕관을 그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만큼 심각한 문제가 그를 괴롭혔습니다. 루드가르다와의 결혼 생활에서 아들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불임을 치료하려는 발버둥

그는 머릿속에 분명한 미래상을 그려놓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왕권으로 정점에 이르는 길을 꾸준히 걸어가면서, 동시에 장차 왕좌를 계승할 남자 후계자를 키우고 싶어 했습니다. 아버지 없이 홀로 자란 그였기에 이 갈망은 더욱 절실했을 수 있습니다. 바라던 후계자를 기다리며 안달하던 그의 조급함도 놀랄 일이 아니었습니다.

루드가르다와 시녀들 역시 불임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려 여러 처방을 찾아 헤매곤 했습니다. 당시에는 아이디어가 넘쳐났습니다. 몽펠리에 대학에서 수학한 도미니크회 수사 니콜라스, 즉 시에라츠 공작의 궁정 의사는 도마뱀과 개구리를 먹으면 모든 고민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필사적인 대폴란드 공작부인이 그의 권고를 따랐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느 쪽이든 세월은 흘렀고, 루드가르다는 임신하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희망이 사라지면서 왕자 부부의 관계는 갈수록 악화되었습니다. 1280년대 초에는 십대 시절의 설렘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프셰미슬은 여느 때처럼 불임의 책임을 아내에게 돌렸고, 짜증은 원망으로, 원망은 마침내 증오로 번져갔습니다.

공작부인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 되었습니다. 외롭고, 남편에게 버림받고, 궁정 사람들에게 차갑게 대접받으며 그녀는 가을잎처럼 시들어갔습니다. 그녀는 대부분 자신의 처소에 머물렀고, 공개 행사와 축제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프셰미슬은 아내를 부끄러워하는 듯했고, 그녀를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지고 짜증이 나며 화까지 났습니다. 이혼은 당연히 선택지가 될 수 없었습니다. 교회가 금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왕자에게는 아내를 제거할 다른 방법이 있었습니다.

루드가르다의 미스터리한 죽음

루드가르다는 1283년 12월 11일부터 15일 사이 그니에즈노 성에서 죽었습니다. 당시 프셰미슬은 피즈드리 근처의 공작 영지에 있었습니다. "아내의 불임과 남자 후계자에 대한 갈망 때문에 그는 몇몇 사람을 보내 그녀를 죽였다"라고 15세기 연대기 작가 얀 드우고시는 기록했습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공작부인은 미리 어떤 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직감했고, 우는 소리로 고향 포메라니아로 돌려보내 달라고 남편에게 간청하기까지 했습니다.

운명은 프셰미슬 2세를 조롱했습니다. 그 자신도 훗날 암살자의 손에 죽었으니까요.

하지만 간청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군주는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하인들에게 아내를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가 떠난 후 여인은 하인들에게 베개로 목이 졸려 숨을 거두었습니다. "프셰미슬은 자신의 범죄가, 알아차린 사람이 많지 않은 그 범죄가 영원한 침묵 속에 가라앉으리라 생각했다"고 역사가는 덧붙였습니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23세 공작부인의 죽음 소식은 대폴란드 전역에 산불처럼 번지며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평민들에게 통치자가 살해의 배후에 있다는 데 의심의 여지는 없었습니다. 비참한 공작부인과 잔인한 남편에 대한 민요와 설화가 비 온 뒤 버섯처럼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대폴란드 피아스트 왕조의 이 인물은 신중하게도 깊은 애도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위선을 드러내도 아무도 속지 않으리라는 것, 그리고 억지 슬픔은 오히려 의심만 키울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그는 후계자의 어머니가 될 새 후보를 적극적으로 물색했습니다. 적임자는 스웨덴까지 가야 하는 꽤 먼 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릭사는 스웨덴 국왕 망누스의 조카로, 그의 궁정에서 자랐습니다. 프셰미슬은 자신의 서기관 틸론을 북쪽으로 보내 대리 결혼을 진행하게 했습니다. 혼인은 10월 11일 뉘셰핑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후 사절은 신부를 대폴란드로 데려왔고, 그곳에서 결혼 의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스웨덴 출신의 이 여인은 포즈난의 통치자 마음에 들었습니다. 어쩌면 예상보다 더 아름다워 기분 좋게 놀랐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기질 면에서 프셰미슬과 루드가르다보다 훨씬 잘 맞는 커플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군주는 공식 문서에서 훗날 스칸디나비아 출신의 아내에 대해 따뜻하게 언급하며 그녀를 "사랑하는 아내"라고 불렀습니다.

들뜬 왕자는 새로운 열정으로 위대한 계획의 실행에 나섰습니다. 밤에는 후계자를 얻기 위해 애썼고, 낮에는 정치적 동맹을 결성하고 계획을 세우며 음모를 꾸몄습니다.

출처

위 글은 마르친 시마니아크의 저서 《폴란드의 암살》에서 발췌한 내용으로, 즈나크 호리존트(Znak Horyzont) 출판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

제목, 리드, 삽화 및 캡션, 볼드 처리와 소제목은 편집실이 추가한 것입니다. 본문은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단락 구분 등 기본적인 편집을 거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