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와 불평등의 시대, 정원 마을의 등장
19세기는 진보와 번영의 시대였지만, 동시에 불평등이 심화되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노동자들은 겨우 생계를 유지할 정도로 벌었고, 빈민가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이러한 열악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혁신적인 '정원 마을'이 등장하게 됩니다.
유럽 전역의 사상가들과 실천가들은 빈곤 문제를 고민했습니다. 일부는 오직 혁명만이 해결책이라 믿었지만, 다른 이들은 그러한 결과를 막기 위해 개혁을 추진하고 빈곤을 완화할 실질적인 방안들을 모색했습니다. 수많은 자선 단체와 인도주의자들, 교회, 재단, 협회들이 노동 계급의 삶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저렴하고 쾌적한 주택 건설 역시 그러한 노력 중 하나였습니다. 초기에는 주로 민간 주도로 이루어졌습니다.
20세기로 넘어가는 무렵, 자유주의 정부는 1901년 주택법(Housing Act)을 비롯한 일련의 중요한 법률을 도입했습니다. 이 법은 한편으로는 여전히 대부분 민간에 의존하던 주택 시장에 대한 감독을 강화한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부 보조금 지원을 통해 사회주택 건설의 가능성을 크게 넓힌 것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수많은 노동자들이 주택협회에 힘을 모았습니다. 대표적으로 1909년에 설립된 암스테르담의 에이겐 하르트(Eigen Haard)와 1910년에 설립된 알게메네 원보우베레니깅(AWV)이 있습니다.
영국의 본보기, 가든시티 운동
확대된 사회주택 건설의 기회는 델프트 공과대학교에서 교육받은 진보적인 젊은 건축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했습니다. 1904년, 그들은 암스테르담 출신 아리 케플러(Arie Keppler, 1876~1941)를 포함해 '민주주의 엔지니어·건축가 사회기술협회'를 결성했습니다. 이들은 다른 지역의 주택 사업 사례를 연구하고 도시계획과 토지 이용에 관한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특히 영국 언론인 에버니저 하워드(Ebenezer Howard, 1850~1936)가 제창한 '가든시티(정원 도시)' 구상은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베스트셀러 『내일의 가든시티(Garden Cities of To-Morrow, 1902)』에서 녹지가 풍부하고 건강하며 여유롭고 자급자족이 가능한, 인구 3만 명 이하의 도시 건설 구상을 펼쳤습니다. 이 책은 1903년 런던 북쪽에 렛치워스(Letchworth)라는 가든시티가 건설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네덜란드 건축가들은 현지를 직접 방문해 하워드의 책을 두루 논의했습니다. 이미 꽉 찬 좁은 나라인 네덜란드에서 완전한 자급자족형 가든시티를 만드는 것은 다소 무리라는 판단이었지만, 하워드의 아이디어를 기존 도시 외곽에 새로 조성될 노동자 주거지에 적용하는 것은 매우 적합하다고 여겨졌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정원 마을' 구상입니다.
진보적인 시의회와 케플러의 실천
이 구상의 열렬한 지지자 중 한 명이 바로 케플러였습니다. 1915년부터 암스테르담 주택국 국장으로 임명된 그는 정원 마을 구상을 실천에 옮길 기회를 얻게 됩니다. 때마침 암스테르담 시의회는 결단력 있는 사회민주당 시의원 바우트(Wibaut)가 주도하고, 자유주의 시장 얀 빌럼 텔레겐(Jan Willem Tellegen, 1859~1921)이 의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과밀화된 도시 문제 해결에 힘을 쏟고 사회주택 건설을 적극 장려하는 인사들이었습니다.
케플러는 성장하는 도시 주변에 네 곳의 정원 마을을 조성했습니다. 그중 가장 잘 알려진 곳은 1923년부터 1930년까지 건설된 튄도르프 바터흐라프스메르(Tuindorp Watergraafsmeer)로, 도시 남쪽에 들어선 유일한 정원 마을입니다. 건축가 얀 흐라타마(Jan Gratama, 1877~1947)와 헤릿 페르스테흐(Gerrit Versteeg, 1872~1938)가 설계를 맡았으며, 이들은 에이겐 하르트와 AWV를 위해 새 정원 마을에 1,100호가 넘는 주택을 지었습니다.
흐라타마와 페르스테흐는 당시 영입된 건축가들의 배경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입니다. 전자는 델프트 시절부터 케플러와 알던 이상주의적 건축가였고, 후자는 목수 일을 거치며 스스로 노력해 건축 기사까지 올라간 농부의 아들이었습니다.
콘크리트 실험, 베톤도르프
두 주택협회는 네덜란드의 전통에 따라 벽돌을 사용해 담백한 암스테르담 학파 스타일로 건축했습니다. 그러나 케플러는 시를 대신해 900호의 주택을 추가로 짓고 싶어 했으며, 콘크리트를 건축 재료로 활용하는 실험을 추진했습니다. 당시 콘크리트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극심한 공급 부족으로 값이 치솟은 벽돌보다 훨씬 저렴했습니다.
케플러는 각기 다른 공법을 가진 십여 곳의 콘크리트 제조업체를 섭외했고, 각 업체는 자신만의 건축가를 내세워야 했습니다. 여기에는 콘크리트 실험에 관심 있던 흐라타마를 비롯해, 하를렘 출신 건축가 한 반 로헴(Han van Loghem, 1881~1940), 암스테르담 출신 딕 그레이너(Dick Greiner, 1891~1964) 등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베톤도르프(Betondorp, 콘크리트 마을)'라 불리게 된 이 지역은 7년에 걸쳐 건설되었습니다.
빛, 공기, 그리고 여유
젊은 건축가 그레이너는 어쩌면 케플러와의 우정 덕분일지도 모르지만, 정원 마을의 심장부인 마을 광장을 설계하는 영예로운 임무를 맡았습니다. 정원 마을 구상에 따라 이곳에는 상점, 도서관, 협회 건물, 노인들을 위한 안뜰 형태의 시설 등 필요한 편의시설들이 들어섰습니다.
이 지역은 녹지와 공기, 빛이 풍부한 널찍한 공간이었고, 여러 학교와 다양한 놀이·운동 시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는 주민들의 정신적·육체적 건강과 지식 함양을 증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주택들은 평지붕과 경제적인 평면 구조를 특징으로 비교적 획일적인 디자인을 보였으며, 가능한 한 단독주택을 짓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케플러에게 단독주택에 사는 것은 곧 노동자의 행복이었기 때문입니다.
튄도르프 바터흐라프스메르는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도심에서 다소 멀리 떨어져 있고 임대료도 높은 편이었음에도, 정원 마을에 살기를 원하는 사회주의 성향의 노동자들과 하급 공무원들이 많이 찾아왔습니다. '붉은 마을'이라 불린 이곳은 매년 5월 1일이면 붉은 깃발의 바다가 되었고, 도서관은 많은 이용객으로 붐비는 등 풍성한 동아리 문화가 꽃피웠습니다.
또한 이 마을은 우수한 교육 시설 덕분에 주민들의 사회적 성취를 돕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시대가 변하고 베톤도르프의 인구 구성도 달라졌지만, 이 사회민주주의적 주거 모델의 사례는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인기 있는 동네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