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고고학자이자 모험가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은 오스만 제국의 땅에서 호메로스가 노래한 도시 트로이를 발굴해냈다. 그러나 그는 첫 발굴 사업(1870~1874)에서 찾아낸 보물들을 불법으로 고향으로 가져갔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오스만 제국은 이러한 문화재 약탈에 깊은 분노를 느꼈으며, 동시에 그리스 고대의 지적 유산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내우외환의 오스만 제국
슐리만(1822~1890)이 오스만 영토에 삽을 들이던 시절, 거대한 제국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민족주의 분리 독립 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났고, 제국주의 열강들은 국경 밖에서 쇠약해진 터키 영토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오스만의 반격
19세기 말 오스만 제국에는 근대화가 절실했다. 이를 위해 개혁 세력은 유럽의 역사와 계몽주의 이상에 주목했다. 그들은 지리적으로 자신들이 일부였던 고전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 당대 문명과의 연결고리를 찾으려 했다. 이슬람 신민들, 특히 엘리트층은 이슬람 이전의 고전 문학에 큰 관심을 보였다.
암스테르담 대학교의 문화과학자 귀나이 우슬루(Günay Uslu)는 19세기 오스만 사료에 대한 정밀한 연구를 통해 이러한 관심이 기존 문헌에 기록된 것보다 훨씬 컸음을 밝혀냈다. 지금까지 고고학 발굴에 대한 역사 연구는 주로 서방 자료에 의존해 왔기 때문에 오스만의 참여는 상대적으로 조명받지 못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발굴에 관한 엄격한 법률, 자체 고고학자 양성, 나아가 19세기 말에는 대형 박물관까지 갖추며, 전설의 도시 트로이에 대한 배타적 권리가 유럽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유물을 약탈하는 고고학자들
유럽은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그리스·로마 조상에게서 찾았지만, 고대 제국의 상당 부분은 실제로 오스만 영토 안에 있었다. 19세기에 유럽 고고학자들이 고대의 유산을 훔쳐 달아난 사실은 오스만인들에게 큰 충격과 분노를 안겨 주었다. 이에 제국은 법률을 여러 차례 개정했는데, 대표적으로 1884년에는 원본 고고학 유물의 수출 금지, 발굴 허가 발급 제한, 외국인 방문객의 유적지 출입 제한 등이 시행되었다.
이 법률과 철저한 감독은 유럽 고고학자들에게 강력한 견제력으로 작용했다. 오스만이 고전 고대의 문화유산을 진지하게 여겼다는 사실은 19세기 말 터키 고고학자들의 발굴 참여 확대와 제국 박물관 전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오스만 감찰 당국은 과거 약탈 전례 때문에 트로이에서 새로 진행된 슐리만의 발굴을 예의 주시했다. 독일인들은 이를 주로 괴롭힘으로 여겼다. 그들에게 고전 고대는 유럽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오스만은 자신들의 유산을 지키고, 트로이를 둘러싼 신화적 서사를 자신들의 역사 서술에 편입하고자 했을 뿐이다. 트로이 발굴은 유럽뿐 아니라 오스만에서도 큰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트로이는 더 이상 서사시 속 도시가 아니라 오스만인들에게 실재하며 심지어 손에 잡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는 『일리아드』가 오스만어로 여러 차례 번역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갈리폴리 전투와 트로이의 재발견
트로이의 전설적 서사가 터키 역사의 진정한 일부가 된 것은 1915년 갈리폴리 전투 이후였다. 트로이의 영웅들이 서쪽에서 넘어온 적으로부터 해안을 지켜야 했듯, 오스만 군대도 이제 공격적인 서방의 적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오스만은 이 전투에서 승리했고, 사령관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 1881~1938)은 위대한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는 1923년 '아타튀르크'라는 이름으로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귀나이 우슬루, 『호메로스, 트로이, 그리고 터키인: 후기 오스만 제국의 유산과 정체성 1870-1915』 (암스테르담 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5년 11월 13일)
유럽에서는 고전 고대를 주로 우리 문명의 요람으로 여기지만, 실제로 역사의 상당 부분은 오늘날의 터키 땅에서 펼쳐졌다. 귀나이 우슬루는 호메로스와 트로이에 대한 오스만의 시각, 그리고 트로이 고고학에 대한 그들의 참여를 탐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