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실크로드는 유라시아 대륙을 동서로 관통하며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고대 교역로입니다. 기원전 130년경 중국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열렸으며, 육상과 해상 경로를 통해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남아시아, 페르시아, 아라비아반도, 동아프리카, 남유럽과 이어주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실크로드는 동서를 잇는 단일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실크로드(Seidenstrassen)'라는 이름은 19세기 독일의 지리학자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이 1877년 강연에서 처음 사용한 것으로, 그 역시 횡단유라시아 교역이 거대한 흐름임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 길을 따라 향신료, 사향, 차 등 다양한 상품들이 오갔으며, 상인들 사이에서 여러 번 손바닥을 거치며 먼 거리를 이동했습니다. 화약, 종이, 면직물 생산 기술 같은 기술 전파가 비단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고대 로마가 중국산 비단을 귀하게 여긴 것이 동서 간 교역로 건설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죠.
누에를 치고 실을 뽑는 양잠업은 기원전 3천 년경 중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주나라 시대의 민요에는 비단 짜기와 섬유 생산이 자주 언급될 정도였습니다.
옥(玉) 무역

실크로드보다 앞선 교역은 옥무역이었습니다. 황허강과 양쯔강 유역의 중국 공동체들은 역사적으로 황금보다 옥을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왕들의 무덤에서 출토된 옥품들은 대부분 현재 신장위구르 자치구의 타클라마칸 사막 가장자리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 호탄에서 생산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실제로 호탕에서 중국 동부까지 이어지는 길은 최소 기원전 5000년경부터 옥 운송로로 사용되었습니다. 비단 무역이 지리적으로 훨씬 광범위했기에 '실크로드'라는 이름이 쓰이게 되었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옥의 길(Jade Road)'이라 불렸을 수도 있습니다. 이 명칭은 중국에서도 실제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실크로드는 초문화적 교역의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길을 따라 위대한 문명들이 관계를 맺었고, 제국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했습니다. 이 연결망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며 사회와 제국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또한 실크로드가 흑사병 판데믹을 일으킨 페스트균의 주요 확산 통로 가운데 하나였다는 견해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동쪽에서 시작된 실크로드

5세기 무렵, 현재의 중국 동부 지역에는 일곱 개의 농경 국가들이 패권을 두고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중 진(秦), 조(趙), 연(燕)이라는 세 북방 국가는 서로 싸우면서도 유목 기병의 침공에도 대응해야 했습니다. 월지(月氏) 지역 동쪽, 몽골 초원에는 흉노라는 강력한 유목 연합이 자리 잡고 있어 중국의 인접 국가들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습니다.
기원전 221년, 진나라의 첫 황제 시황제가 일곱 나라를 통합하여 진 제국을 세웠을 때도 흉노는 그의 제국 통치에 큰 위협이었습니다.
진나라와 이후 한나라의 통치자들은 유목민들을 달래거나 말을 구매하기 위해 대량의 비단 직물을 보냈습니다. 일부 비단은 흉노 귀족들에게 하사하기 위한 국영 생산품이었지만, 농가의 여인들이 짜낸 일반 비단 직물이 훨씬 많았습니다.
유목민들은 비단 직물을 모피 코트 안감으로 활용했고, 비단실은 누비 천을 만드는 데 쓰였습니다. 누비 재질은 따뜻할 뿐만 아니라 매우 가벼워 코트, 바지, 침구류 제작에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스텝 지역의 추장들은 정교한 비단옷을 입음으로써 부하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우아함을 과시했습니다.
비단의 중요성
정착민이든 유목민이든, 지배 엘리트들은 먼 나라의 희귀 물건에 대한 갈증으로 초기 국제 무역을 이끌었습니다. 해외에서 들여온 특별하고 사치스러운 물품만이 정치적 엘리트를 백성들과 구별해 주었던 것입니다. 흉노의 지배자는 한나라의 비단 예복을 핵심 부하들에게 분배함으로써 충성심을 유지하고 정치적 서열을 드러냈습니다. 스텝 지대에서 비단은 권위와 긍지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이 교역로는 수많은 외국 상인들을 만리장성의 문앞으로 불러모았습니다. 옥문관을 통해 점점 더 많은 상품, 향신료와 향료, 보석, 다양한 모직물들이 수도 장안으로 흘러들었습니다. 상품과 함께 외국의 기후, 음식, 의복, 화폐에 대한 정보도 전해졌고, 중국의 사관들은 남아시아와 지중해까지 이르는 먼 나라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비단 직물은 중국 내에서도 너무나 보편화되어 있어, 모든 농가가 곡식과 비단을 한나라 정부에 세금으로 납부했습니다. 남자들은 땅을 경작했고, 여자들은 누에의 먹이가 될 뽀득나무 잎을 얻기 위해 뽀득나무를 가꿨습니다. 고치에서 비단 섬유를 얻고, 실을 뽑아 비단천을 짰습니다. 정교한 베틀과 높은 기술, 세련된 분업이 필요한 금직(錦織)·태피스트리·자수 비단은 주로 대규모 국영 기업의 산물이었습니다. 유목민들과의 비단 무역은 중국 직물의 명성을 널리 퍼뜨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실크로드의 탄생
벌레에서 비단이 만들어진다는 발상은 대부분의 사회에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당시 다른 사회들은 동물의 털이나 식물로만 직물을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이 독특한 직물은 사람들의 이주와 함께 서쪽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교역로 양 끝의 사치품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이 길을 따라 상인들을 위한 새로운 도시들이 세워졌습니다. 상인들은 대개 상단(商團)을 조직해 이동했습니다. 한 무제의 통치 기간이던 기원후 1세기 초부터 실크로드의 주요 경로를 따라 상단 도시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조정이 서방에서 들어오는 상품에 깊은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이 강력한 황제는 교역로의 안전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습니다.
기원 후 전한에서 후한으로 왕조가 교체되던 혼란기에는 서역과의 무역이 위축되었습니다. 같은 시기 새로운 오아시스 국가들도 세력다툼을 벌였고, 오아시스 간 긴장은 교역망을 파탄에 이르게 할 수 있었습니다. 중앙아시아 무역의 생존은 한나라 도시들의 서방 상품 수요와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행정력에 달려 있었습니다. 1세기 중반, 한 조정은 서방 교역로의 통제권을 회복하고 서역에서 가까운 지역에 대한 지배를 재확립하기 위한 군사 원정을 여러 차례 단행했습니다.
중국에서 생산된 많은 비단 직물과 일부 현지 생산품들은 건조한 기후 덕분에 중앙아시아 오아시스 지역의 고분에서 발굴되었습니다. 이 중 일부는 한나라 시대의 것으로, 무늬를 올려짜 만든 가벼운 평직·갈라직에서부터 금직과 자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무게와 형태를 보여줍니다.
한나라의 천마
한 조정은 만리장성 문앞에 들어온 외국 상품 가운데서도 중앙아시아 스텝 지역의 준마(駿馬)를 무엇보다 높이 평가했습니다. 수세기에 걸친 유목민과의 관계를 통해 정착 왕조들은 전쟁에서 기병의 유용성뿐 아니라 기마 문화를 경제적 자산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중국 토양에는 셀레늄이 부족하여 말에게 근육 약화와 성장 저해를 일으켰습니다. 그 결과 중국산 말은 병사의 무게를 감당하기에 너무나 허약했습니다. 반면 유라시아 스텝의 유목민들은 중국이 탐내는 우수한 말을 사육했습니다. 농경 사회는 유목민들에게 곡물과 비단 같은 상품으로만 수요를 충족시켜 줄 수 있었습니다. 만리장성이 완공된 후 유목민들은 장성 문 앞에 모여 무역을 벌였습니다. 장성에 주둔한 병사들은 종종 비단으로 봉급을 받았는데, 유목민들은 이를 곡물과 교환했습니다. 이처럼 중국은 실크로드 무역을 계속 주도하게 됩니다.
한나라는 중앙아시아를 정복했고, 유목 상인들은 그곳에서 상품을 더 서쪽과 남쪽으로 옮겼습니다. 무역은 새로운 인식, 사상, 사물을 그 어디에도 닿지 않았던 곳까지 전파시켰습니다.
왕의 길(Royal Road)

아케메네스 제국의 페르시아 황제 다리우스 1세는 수사(현재의 이란)에서 사르디스(현재 터키의 지중해 연안 근교)까지 서쪽으로 1,600마일이 넘게 이어지는 '왕의 길'을 건설했습니다.
페르시아인들은 이후 왕의 길을 확장하여 인도 아대륙과 북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작은 지선들까지 포함시켰습니다.
고대 그리스 마케도니아 제국의 통치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왕의 길을 따라 제국을 페르시아까지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실크로드는 결국 이 경로의 일부를 포괄하게 됩니다.
서쪽에서의 발전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마케도니아 제국이 중앙아시아로 확장된 것은 실크로드 발전의 다음 큰 전환점이었습니다. 그는 기원전 329년 페르가나 계곡 입구에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타, 즉 '가장 먼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했습니다.
그 후 3세기 동안 그리스인들은 중앙아시아에 계속 남았습니다. 특히 에우티데모스 통치기(기원전 230~200년)에는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타를 넘어 소그디아나까지 세력을 확장하며 동진을 거듭했습니다. 그는 타클라마칸 사막 서쪽 끝의 카슈가르까지 도달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는 기원전 200년 무렵 중국과 서방 사이에 형성된 최초의 알려진 접촉이 됩니다.
그러나 기원전 146년 코린토스 전투에서 그리스 반도가 로마 공화국에 항복하면서 마케도니아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습니다.
로마 제국

북메소포타미아(현재의 이란 지역)가 중국의 가장 가까운 교역 상대가 되면서 상당한 문화 교류가 일어났습니다. 한나라 시대에 중국은 종이를 발명했고, 비단보다 문화적 영향력이 훨씬 컸던 화약도 탄생했습니다. 비단 산업에서 비롯된 유행보다 동방의 풍부한 향신료가 더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기원전 27년~기원후 14년)에는 이미 중국과 서방 간의 무역이 자리 잡았습니다. 이집트, 그리스, 로마에서 가장 귀하게 여겨진 것은 비단이었습니다.
비단은 기원전 1세기에 이집트와 로마까지 전해졌습니다. 제정 초기부터 비단은 부와 권력의 상징이 되었는데,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 개선식 때 입은 것이 대표적입니다. 이 시기 로마 제국은 성장하여 지중해 서안의 지배권을 확보했고, 이후 수 세기에 걸쳐 지중해 연안 전체를 지배하는 제국으로 커져갔습니다.
로마와 한나라가 모두 크게 성장했지만, 양자 사이에는 여전히 상당한 거리가 있었습니다. 중앙아시아에는 산맥, 사막, 광활한 초원이 펼쳐져 있었죠. 로마와 한나라 제국을 연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상인들이었습니다.
로마 상인들은 지중해 동안의 상점에서 교역을 했습니다. 아시아 여러 나라의 상인들은 비단 길을 따라 상단 도시들을 거쳐 비단을 이 로마 창고들로 운반했습니다. 1세기 로마 공화국이 로마 제국으로 전환되면서 로마와 다른 주요 도시들의 삶도 발전했습니다. 제국의 끊임없는 팽창은 지중해 연안과 그 너머 동쪽의 사람과 상품을 하나로 묶어냈습니다.
로마 제국의 몰락
로마의 제국으로서의 성장은 낙타를 통해 육상으로 운송되는 상품들에 거대한 시장을 제공했습니다. 향신료, 향료, 비단—당시 새롭고 사치스러웠던 이 상품들이 가장 값진 물건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실상 국고는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로마 시장이 중국산 비단과 아시아 먼 지역의 사치품을 너무 많이 사들였던 것입니다. 값비싼 비단 재료로 자신을 꾸미고자 했던 로마의 부유한 귀부인들이 로마의 금속 화폐 공급을 고갈시킨 셈입니다.
서로마 제국은 아시아산 공예품에 대한 수요와 함께 5세기에 마침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비잔틴 제국

멸망하지 않고 살아남은 로마 제국의 동쪽 절반, 비잔틴 제국은 로마의 비단 수입을 이어갔습니다. 비잔틴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재위 527~565년)는 중국이 요구하는 값비싼 비단값을 지불하는 대신, 수사(使臣) 두 명을 승려로 위장시켜 누에를 확보해 서방으로 밀수하게 했습니다. 이 전략은 성공했고, 비잔틴의 비단 산업이 탄생했습니다. 서방은 비단이 중국의 나무에서 열리는 것이 아니라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단의 기원은 오랫동안 비밀이었습니다. 중국은 누에와 비단 뽑기 기술을 철저히 보호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비잔틴이 중국에서 누에 알을 이미 확보했더라도, 중국산 비단의 품질은 훨씬 뛰어났습니다.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유럽 전역의 의식과 귀족 의상에 현지산 비단을 사용했습니다.
페르시아인들도 비단 생산을 배웠고, 아랍 지배 하에서는 다마스쿠스가 비단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이 비잔틴 제국을 정복하면서 고대 실크로드의 경로는 폐쇄되고 말았습니다.
당나라 제국

중국의 당나라(618~907년)는 두 번째 실크로드를 열었습니다. 이 무렵 중앙아시아인들도 이미 비단 생산법을 익혔지만, 중국산 비단은 여전히 우월한 품질로 수요가 이어졌습니다. 당의 통치자들도 한나라 선조들처럼 군사 목적의 말을 필요로 했습니다. 당은 말 한 필당 비단 40필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말과 비단을 교환했습니다.
비단을 매개로 한 문화 교류는 당나라 시대에 절정에 달했습니다. 물론 비단만이 문화 교류의 매개는 아니었습니다. 실크로드 네트워크는 의학, 종교 등을 실어 날랐습니다. 아랍인들은 인도와 중국을 방문했고, 중국인들은 중앙아시아, 인도, 페르시아를 여행했습니다. 이 길을 따라 불교는 인도에서 티베트와 중국으로 전해졌습니다. 수피 학자들과 군대는 이슬람을 서아시아에서 중국과 인도까지 대륙을 가로질러 전파했습니다. 무술, 서예, 회화 또한 이 길을 따라 이동했습니다.
당의 수도 장안은 세계적인 허브가 되어 아시아 전역에서 실크로드를 따라 온 상인들을 끌어모았습니다.
몽골 제국

1207년부터 1360년경까지 몽골의 아시아 정복은 정치적 안정을 회복시키고 실크로드를 부활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몽골이 교역로를 장악하면서 무역은 이 지역을 자유롭게 흐를 수 있었습니다. 다만 몽골인들은 끝내 유목 생활 방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13~14세기, 몽골의 후손들이 아시아를 지배하던 시기에 세 번째 실크로드가 융성했습니다.
탐험가들은 극동의 문화와 지리에 대해 더 깊은 이해를 원했습니다. 베네치아의 탐험가 마르코 폴로는 1275년 몽골 제국 시대에 실크로드를 따라 이탈리아에서 중국으로 여행했습니다. 1295년, 몽골 제국이 분열되기 시작할 무렵 그는 두 번째로 실크로드를 따라 베네치아로 돌아왔습니다. 실크로드를 따라 행한 그의 여정은 『마르코 폴로 여행기』 집필의 영감이 되었습니다.
결론

몽골 제국의 몰락은 실크로드의 정치적·문화적·경제적 통합을 약화시켰습니다. 투르크멘족은 서쪽 실크로드 주변의 쇠약해진 비잔틴 제국 영토를 점령했습니다. 몽골 제국 멸망 이후 실크로드의 강대 정치 세력들은 경제적·문화적으로 고립되었습니다. 흑사병의 참화 이후 지역 국가들이 형성되면서 유목 세력의 권위도 쇠퇴해 갔습니다.
유럽과 아시아의 교차로에 위치한 아르메니아는 수출 증대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아르메니아는 이 지역의 사실상 모든 교역로에 대한 독점권과 거대한 상업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1700년부터 1765년까지 페르시아 비단 수출을 단독으로 담당했습니다.
비단 무역은 1720년대 사파비 제국이 무너질 때까지 계속 성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