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역사 속 오늘, 나토(NATO)가 유고슬라비아 폭격을 개시하다

역사 속 오늘: 나토, 유고슬라비아 폭격 개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북마케도니아가 독립한 뒤인 1999년 3월 24일 저녁 8시 45분, 나토(NATO) 전투기들이 유고슬라비아 내 주요 목표물에 대한 공습을 개시했습니다.

나토가 유고슬라비아를 폭격한 결정적 이유는 코소보의 미래에 관한 협정 서명을 유고슬라비아가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공습은 유고슬라비아군이 해당 지역에서 철수할 때까지 약 석 달간 지속되었으며, 이는 동맹 역사상 처음으로 주권 국가를 상대로 감행한 공격이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 공격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유럽 대륙에서 벌어진 최초의 공중 공격이었고, 그리스 북부 국경에서 불과 한 걸음 거리에 있는 나라를 향해 이루어졌습니다.

빈우라늄 폭탄과 전략 기반 시설 타격

이번 폭격에서 나토군, 특히 미군은 당시 최신 기술이었던 빈우라늄(depleted uranium) 폭탄을 사용했으며, 주로 유고슬라비아 국가의 전략적으로 중요한 기반 시설들을 표적으로 삼았습니다.

빌 클린턴 대통령 임기 마지막에서 두 번째 해에 벌어진 이 군사 작전은 그리스에서 거센 여론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주로 유고슬라비아 국민을 지지하는 집회와 콘서트 형태로 표출되었습니다.

실제로 그리스 명문 축구단 AEK는 과감한 행보를 보였습니다. 폭격 한복판에서 베오그라드를 찾아가 파르티잔(Partizan)과 반전의 의미를 담은 친선 경기를 펼친 것입니다.

유엔 관리하의 코소보와 막대한 인적·경제적 피해

폭격은 합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되었고, 그 결과 유고슬라비아군의 코소보 철수와 함께 유엔 코소보 잠정행정부(UNMIK)라는 유엔 평화유지 임무가 수립되었습니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가 치른 희생은 너무나 컸습니다. 사망자만 무려 3,600명에 달했습니다. 대부분은 민간인이었지만 군인과 경찰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유고슬라비아의 경제적 피해는 1999년 기준 무려 300억 달러에 이르렀습니다.

나토의 유고슬라비아 폭격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벌어진 가장 대규모의 군사 작전이었습니다. 나토 회원국 중 그리스, 아이슬란드, 룩셈부르크를 제외한 모든 국가가 폭격에 참여했습니다. 또한 아직 나토 회원국이 아니던 유고슬라비아 인접국들 역시 자국의 영토와 영공을 북대서양동맹군에 제공했습니다.

쿠마노보 합의와 작전 종결

쿠마노보에서 합의가 도출되고 이것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제1244호로 승인된 후, 유고슬라비아 육군과 치안부대의 코소보 철수가 시작되었으며, 1999년 6월 12일 국제 군사력이 현지에 배치되면서 폭격은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