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메리카의 역사

아라과이아 게릴라: 브라질 군사독재에 맞선 공산주의 무장 투쟁

아라과이아 게릴라(Guerrilha do Araguaia)는 공산주의 게릴라 세력과 브라질 국군 사이에 벌어진 무장 충돌을 가리킵니다.

이 전투는 1972년부터 1974년까지 현재의 토칸칭스(Tocantins) 주 북부 지역에서 벌어졌습니다.

역사적 배경

메디치(Medici) 정부(1969~1974) 집권 기간은 브라질 군사독재가 반대파에 대한 탄압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습니다. 치안 당국은 체포를 자행했고, 고문을 통해 확보한 정보를 바탕으로 군사독재 전복을 계획하던 좌파 조직들을 하나씩 와해시켜 나갔습니다.

한편 공산주의 그룹들은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을 모색했습니다. 일부는 시위 행진 등 도시 지역 활동에 주력했고, 또 다른 이들은 여론의 관심을 자신들의 대의로 끌어모으고자 외교관 납치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남의 저항이나 체 게바라(Che Guevara)의 활동에서 영감을 받은 세력은 농촌 게릴라전을 군사정권 종식의 수단으로 여겼습니다. 중국에서 사용된 농촌 게릴라 거점 전략 역시 이들에게 하나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브라질 공산당(PCdoB) 당원 일부는 군사 훈련을 받고 '비코 두 파파가이우(Bico do Papagaio)'로 불리는 지역에 잠입했습니다. 이 지역은 고이아스(Goiás), 파라(Pará), 마라냥(Maranhão) 세 주가 경계를 이루는, 아라과이아 강변에 위치한 곳이었습니다.

아라과이아 게릴라: 브라질 군사독재에 맞선 공산주의 무장 투쟁

아라과이아 게릴라 지도

군대와의 전투

브라질 육군은 해당 지역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즉시 병력을 파견했습니다. 처음에는 경험이 부족한 신병 부대를 보냈지만, 게릴라 활동이 확산되면서 더욱 정예화된 부대를 투입하게 됩니다.

현지 주민들 역시 게릴라로 인해 고통을 겪었습니다. 정부군은 주민들로부터 정보를 빼내기 위해 협박과 고문을 일삼았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육해공 삼군과 군사경찰 병력을 동원해 총 세 차례의 공세를 펼쳤으며, 투입 병력 규모는 3,500명에서 2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최근 진실위원회는 군이 게릴라 소탕 작전에 네이팜탄을 사용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반면 공산주의자들은 남녀 합쳐 69명에서 90명 규모의 조직을 꾸렸으며, 현지 주민들의 지지를 얻기를 희망했습니다.

게릴라전은 크게 세 단계로 구분되며, 각 단계마다 참여 세력의 전과와 좌절이 기록됩니다.

첫 번째 전투

육군은 1972년 4월 12일 기습 공격으로 작전을 개시했습니다.

그러나 신병들의 미숙함과 현지 주민들과의 유대 부족으로 인해 첫 번째 작전은 같은 해 7월에 종료되었습니다. 군사적 성과도 미미하여 게릴라 4명이 사망하고 6명이 체포되는 데 그쳤습니다.

두 번째 전투

1972년 9월부터 10월 사이에 추가적인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대규모 군사 장비가 지역에 투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합류한 농민들과 함께한 게릴라들은 계속해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결국 군 부대가 철수하자 공산주의자들은 이를 큰 승리로 기뻐했습니다.

세 번째 전투

세 번째 작전은 압도적인 병력 차이로 인해 군 내부에서조차 '더러운 전쟁(guerra suja)'이라 불리며 게릴라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전역이었습니다.

이 시기 군은 전술을 변경하여 육군 정보센터(CIE) 소속의 '아라폰가(araponga)'라고 불리는 첩보 요원들을 활용했습니다.

요원들은 도시에 잠입해 주민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했으며, 때로는 고문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두 해에 걸친 군사 작전 기간 동안 최소 17명의 주민이 실종되었고, 수백 명이 잔혹한 심문을 당했습니다.

군은 작전용 도로를 개설하고 지역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켰으며, 게릴라의 공범이라는 혐의를 들어 그들의 농작물과 가옥을 파괴했습니다.

잘 훈련된 병력에 맞설 방법이 없이 점점 고립되어 갔고, 탈출에 성공한 게릴라는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마지막 공격은 1974년 10월에 이루어졌는데, 이때 마지막 여성 게릴라였던 발키리아 아폰수 코스타(Walkiria Afonso Costa)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녀는 샴비오아(Xambióa) 시로 연행된 뒤 그달 25일 살해당했습니다.

아라과이아 게릴라: 브라질 군사독재에 맞선 공산주의 무장 투쟁

군인들에게 붙잡힌 아라과이아 주민들

아라과이아 게릴라의 종말

1975년 3월 15일, 에르네스토 가이젤(Ernesto Geisel) 대통령은 의회에 보낸 짧은 메시지를 통해 아라과이아의 게릴라 거점이 '완전히 소탕되었다'고 선언했습니다.

일부 체포가 이루어졌지만, 게릴라 측 전사 다수는 매복 공격으로 등 뒤에서 총살당했습니다. 특히 눈여겨볼 점은 전쟁 포로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게릴라는 그저 존재 자체가 소멸되었던 것입니다.

아라과이아에서의 패배 이후, 반체제 세력은 군사정권 전복의 수단으로서 농촌 게릴라 노선을 포기하게 됩니다. 이 무렵 반대 운동은 정부군에 의한 체포, 추방, 암살로 인해 점점 분열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정글에 있던 69명(또는 90명)의 전사 중 61명은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소탕 작전에 참여했던 군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시신들은 안도리냐스 산맥(Serra das Andorinhas)으로 옮겨져 화장되었다고 합니다.

아라과이아 게릴라의 결과

  • 법원 명령에 따라 1990년대에 네 차례의 탐사대가 전투 중 사망한 이들의 유골을 찾기 위해 파견되었으나, 2010년까지 게릴라로 확인된 시신은 단 두 구에 불과했습니다.
  • 2009년 6월 18일, 44명의 농민이 금전 보상과 함께 정치적 사면을 받았습니다.
  • 사면법(Amnesty Law)에 따라 아라과이아 게릴라 진압 과정에서 저지른 범죄로 군인이 재판에 회부된 경우는 없습니다.

관련 영화 및 다큐멘터리

  • 《아라과야 - 침묵의 음모(Araguaya - A Conspiração do Silêncio)》 - 감독: 호날두 두키(Ronaldo Duque), 2004년
  • 《리포트의 길: 아라과이아 게릴라》 - 취재: 에메르송 페나, 파울라 시마스 / 편집: 플로리아누 필류, 2010년
  • 《아라과이아의 농민들 - 내부에서 본 게릴라》 - 감독: 반드레 페르난데스(Vandré Fernandes),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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