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메리카의 역사

돔 주앙 6세: 브라질로 천도한 포르투갈 왕, 그의 생애와 업적

돔 주앙 6세(Dom João VI)

돔 주앙 6세는 포르투갈의 섭정왕자를 거쳐 포르투갈·브라질·알가르브 연합왕국의 국왕이 되었고, 1825년 이후에는 포르투갈 국왕으로 재위했습니다.

그는 포르투갈 여왕 마리아 1세(Maria I)와 국왕 페드루 3세(Pedro III)의 아들로, 어머니의 질병으로 인해 1792년 섭정왕자로 임명되었습니다. 1816년 마리아 1세가 서거하자 1818년 브라질에서 국왕으로 즉위했습니다.

재위 기간 동안 프랑스가 포르투갈을 침공하면서 포르투갈 궁정은 브라질로 옮겨졌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정부 기관들을 설립하고 반란과 전쟁에 맞섰으며, 1820년에야 포르투갈로 귀환했습니다.

돔 주앙 6세: 브라질로 천도한 포르투갈 왕, 그의 생애와 업적

국왕 돔 주앙 6세의 초상화, 장바티스트 드브레(Jean-Baptiste Debret)

출생과 성장

1767년 5월 13일에 태어난 돔 주앙은 원래 포르투갈과 식민지의 왕이 될 운명이 아니었습니다. 장남인 조제 왕자(Dom José)가 왕위 계승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788년 형이 요절하면서 그는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었습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간의 평화 정책을 이어가기 위해, 돔 주앙은 1785년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Carlos IV)의 딸인 인판타 카를로타 호아키나(Carlota Joaquina)와 결혼했습니다. 이 결혼은 행복하지 못했지만, 아홉 명의 자녀를 낳았고 그중 여덟 명이 성인까지 성장했습니다.

섭정왕자 시절

여왕 마리아 1세의 정신 건강 문제로 인해 그는 섭정왕자로 임명되었습니다. 여왕은 1786년 남편의 죽음 이후 정신 불안 증세를 보였고, 1792년 의료 위원회는 그녀가 더 이상 통치할 수 없다고 판정했습니다. 이에 따라 돔 주앙은 1799년 왕국의 섭정권을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역사적 배경

이는 유럽 왕국들에게 격변의 시기였습니다. 계몽주의와 자유주의 사상이 나폴레옹의 서적과 군대를 통해 급속히 퍼져나갔습니다. 이는 헌법을 통해 왕권을 제한하는 흐름으로 이어졌으며, 모든 군주가 이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편 프랑스군은 아프리카 대륙을 거쳐 유럽 전역으로 정복 사업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전장에서 최대 적국인 영국과 정면으로 맞설 수 없었던 보나파르트는 1806년 대륙봉쇄령(Continental Blockade)을 선포했습니다. 유럽 각국은 영국과의 무역이 금지되었고, 이를 어길 경우 나폴레옹 군대의 침공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영국과의 오랜 동맹 관계 때문에 봉쇄령 준수를 거부했습니다.

1807년, 나폴레옹의 명령에 불복한 대가로 이베리아 반도는 프랑스가 주도하는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보나파르트는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와 비밀리에 퐁텐블로 조약(Treaty of Fontainebleau)을 체결했습니다. 이 조약에 따라 포르투갈은 프랑스와 스페인 간에 분할되기로 하였고, 프랑스군은 스페인 영토를 통과해 포르투갈로 진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침공은 같은 해 11월에 시작되었습니다. 돔 주앙은 포르투갈에 남아 왕관을 잃거나, 식민지로 피신해 왕좌를 지키는 것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브라질 행

오랜 망설임 끝에, 영국의 압박과 친프파·친영파로 분열된 포르투갈 궁정 내부의 갈등 속에서 돔 주앙은 궁정 전체를 리우데자네이루로 옮기기로 결정했습니다.

배에는 서류, 회화, 가구는 물론 공무원과 왕국 행정 조직 전체가 실려 떠났습니다.

돔 주앙 6세: 브라질로 천도한 포르투갈 왕, 그의 생애와 업적

돔 주앙과 도나 카를로타 호아키나가 리우데자네이루의 노사 세뇨라 두 로사리우 교회에 도착한 모습.

브라질에서의 돔 주앙

브라질의 새 수도에 입성하기 전, 돔 주앙은 식민지 시대의 옛 수도였던 바이아의 살바도르(Salvador da Bahia)에 먼저 상륙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브라질 최초의 의과대학을 설립하고 우호국 항구 개방 칙령을 반포했습니다.

이 칙령은 사실상 브라질의 식민지 지위에 종지부를 찍은 조치였습니다. 그때까지는 포르투갈 선박만이 브라질과 무역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쟁과 반란

돔 주앙 6세의 재위 기간에는 여러 차례의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그중 첫 번째는 포르투갈 침공에 대한 보복 성격을 띤 사건으로, 포르투갈군이 프랑스령 기아나를 점령한 것입니다.

국내적으로도 여러 세력이 돔 주앙 6세의 중앙집권적 정책에 반발했습니다. 가장 성공적인 사례는 1817년의 페르남부쿠 혁명으로, 이 지역은 몇 달간 독립 상태를 유지했습니다.

포르투갈 귀환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하고 빈 회의의 결정이 이루어지면서, 프랑스의 위협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이에 따라 포르투갈 궁정이 브라질에 머무를 명분은 더 이상 없었습니다.

그러나 돔 주앙 6세는 귀환을 계속 미루었습니다. 1820년 포르투 자유주의 반란이 일어나면서에야 그는 민심을 진정시키고 새로 작성된 헌법에 서약하기 위해 리스본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다만 그는 장남 돔 페드루(Dom Pedro)를 브라질 섭정으로 남겨두었습니다. 이 조치는 결국 돔 페드루 주도의 브라질 독립을 지지하는 세력을 형성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포르투갈에 도착한 돔 주앙 6세는 새 헌법 수용 문제를 두고 아내 도나 카를로타 호아키나와 아들 돔 미겔 왕자의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두 사람은 '빌라프랑카다(Vilafrancada)'와 '아브릴라다(Abrilada)' 등 연이은 반란을 일으키며 돔 주앙 6세 폐위를 모의했습니다. 결국 돔 미겔은 추방되었고, 도나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켈루스 궁전에 유폐되었습니다.

브라질의 독립은 영국의 중재와 배상금 지급을 통해 1825년에야 포르투갈에 의해 승인되었습니다. 이듬해인 1826년, 돔 주앙 6세 국왕이 서거하면서 포르투갈의 왕위 계승은 미궁에 빠졌고, 이 불확실성은 형제인 페드루와 미겔 간의 내전으로 이어졌습니다.

흥미롭게도 최근 연구에 따르면 돔 주앙 6세는 비소(砒素) 중독으로 독살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알아두면 좋은 사실

  • 돔 주앙 6세와 도나 카를로타 호아키나의 자녀 중 세 명이 군주가 되었습니다. 브라질 황제 페드루 1세이자 포르투갈 국왕 페드루 4세였던 돔 페드루, 그리고 1828년부터 1834년까지 형 페드루에게 내전에서 패배하기 전까지 포르투갈 국왕이었던 돔 미겔이 그들입니다.
  • 도나 마리아 이자벨(Maria Izabel)은 스페인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 또한 도나 이자벨 마리아(Izabel Maria)는 돔 주앙 6세의 사망 이후부터 돔 미겔의 권력 장악 시기까지 약 2년간 포르투갈의 섭정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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