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우브랑쿠 남작(Barão do Rio Branco)은 브라질의 언론인이자 정치가, 외교관으로, 1902년부터 1912년까지 브라질 외무장관을 역임한 인물입니다.
그는 아르헨티나, 프랑스, 볼리비아와의 중요한 국경 분쟁을 무력 충돌 없이 해결하며 약 90만 km²에 달하는 영토를 브라질에 편입시킨 공로로 브라질 역사에 확실한 이름을 남겼습니다.
지금부터 브라질 근대 국경을 설계한 이 위대한 외교관의 삶을 살펴보겠습니다.

출생과 성장 배경
조제 마리아 다 실바 파라뇨스 주니어(José Maria da Silva Paranhos Júnior)는 1845년 4월 20일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외교관이자 정치가였던 조제 마리아 다 실바 파라뇨스, 즉 리우브랑쿠 자작이었습니다. 당시 집안은 정치인들의 만남의 장소였기에, 어린 시절부터 훗날의 리우브랑쿠 남작은 실전 속에서 자연스럽게 외교를 배웠습니다.
파라과이 전쟁이 진행 중이던 1869년, 그는 아버지와 함께 파라과이·아르헨티나 특사 임무의 비서관으로 동행했습니다. 이후 2년간 연합국과 파라과이 간의 분쟁을 종식시킨 협상 과정을 직접 목격하며 외교적 감각을 키워나갔습니다.
학업과 경력
그는 상파울루와 헤시피의 법학부에서 법률을 공부했으며, 제정 시절에는 검사와 의원으로 활동했습니다. 또한 신문 <아 나상(A Nação)>과 이후 <조르날 두 브라질(Jornal do Brasil)>에 기고하는 언론인으로도 왕성하게 활동했습니다.
당시에는 외교관 공개 채용 시험이 없었고, 관료들은 엘리트층 자녀들 가운데서 임명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리우브랑쿠 남작도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 외교관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흥미롭게도 그의 첫 해외 부임은 당시 스캔들로 여겨졌던 벨기에 여배우와의 관계 때문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이 일로 그는 브라질 주재 리버풀 영사로 지명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주 독일 브라질 공사를 지냈고, 로드리게스 알베스 대통령의 요청으로 귀국하여 외무부 장관직을 맡았습니다. 그는 1902년부터 191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자리를 지켰습니다.
국경 분쟁의 해결
리우브랑쿠 남작은 브라질과 인접 국가 간의 국경 분쟁을 전쟁이 아니라 외교로 해결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리우브랑쿠의 활약 이전 브라질 지도. 아크레주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팔마스 문제 – 1895년
리우브랑쿠 남작의 도움으로 해결된 첫 번째 분쟁이었습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산타카타리나 서쪽 영토를 놓고 다투었고, 이 문제는 국제 중재에 회부되었습니다. 중재자로 선임된 이는 미국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였습니다.
1893년 플로리아누 페이소투는 리우브랑쿠를 이 사건의 브라질 측 변호인으로 임명했습니다. 방대한 문서와 지도에 힘입어 그는 해당 토지가 아르헨티나가 아닌 브라질 영토임을 성공적으로 입증해냈습니다.

아마파 문제 – 1899년
브라질 북부의 국경 또한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브라질과 프랑스는 현재 아마파주 영토의 일부에 대한 권리를 각각 주장했습니다. 프랑스는 경계선이 오야포키강 너머까지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브라질은 바로 이 강이 국경선이 되어야 한다고 맞섰습니다.
현지에서 무력 충돌이 벌어진 후, 양국은 분쟁을 국제 중재에 회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브라질 정부는 리우브랑쿠 남작에게 브라질의 권리를 옹호하는 소청서 작성을 요청했습니다.
1899년 4월, 브라질과 프랑스는 스위스 연방 대통령에게 각자의 각서를 보냈고, 1900년 12월 스위스 대통령은 브라질에 유리한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로써 브라질은 26만 km²의 영토를 추가로 편입하게 되었습니다.
아크레 영토 문제 – 1903년
현재의 아크레주는 브라질과 볼리비아가 모두 영유권을 주장하던 지역이었습니다. 고무 농원에서 일하던 수많은 브라질인들이 거주하던 이곳을 볼리비아가 미국 회사에 임대하면서 상황이 급격히 복잡해졌습니다.
반란과 폭동이 이어지자 브라질 정부는 개입을 결정합니다. 리우브랑쿠 남작은 '실점지 원칙(uti possidetis)', 즉 영토는 실제로 점유한 자에게 속한다는 원칙을 법적 근거로 내세웠습니다.
분쟁은 1903년 페트로폴리스 조약으로 최종 마무리되었습니다. 이 협정에 따라 브라질은 마투그로수주 일부 영토를 볼리비아에 할양하고, 배상금을 지급하며, 마데이라-마모레 철도 건설을 약속하는 조건으로 아크레 지역을 확보했습니다.
외무장관 재임 시기의 외교 원칙
리우브랑쿠의 외무장관 재임 기간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핵심 원칙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 인접 국가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
- 국경 국가에서 내전이나 혁명이 발생할 경우, 항상 합헌 정부를 지지한다.
- 분쟁은 무력이 아닌 외교를 통해 해결한다.
- 남미 대륙에서 유럽의 영향력에 맞서기 위해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한다.
알아두면 좋은 이야기
- '리우브랑쿠 남작' 칭호는 1888년 5월 20일 이자벨 공주에 의해 수여되었습니다. 그는 공화정 시대에도 이 칭호를 평생 사용했습니다.
- 1912년 2월 10일 카니발 한복판에서 세상을 떠났을 때, 추모 열기와 국민적 슬픔으로 인해 리우데자네이루의 축제가 연기될 정도였습니다.
- 같은 해인 1912년, 아크레주의 주도였던 빌라 펜나폴리스(Vila Pennápolis)는 그를 기려 '리우브랑쿠'로 명명되었습니다.
- 그의 초상은 오랫동안 구 1000크루제이루 지폐에 새겨졌고, 사람들은 돈을 '남작(barão)'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글:
- 브라질 영토의 형성
- 귀족제